누르하치의 여진통일과 예허, 칼카(할하)몽고의 몰락 누르하치 관련 이야기

여진 5국 중 마지막으로 남은 예허의 두 주인 서예허의 긴타이시와 동예허의 부양워

그리고 칼카 몽고 5부족의 추장 자이사이.


예허와 칼카 몽고는 각기 1만 명의 강병을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나

모두 비슷한 시기에 누르하치의 팔기군에게 짓밟혔습니다.

자이사이는 1619년 7월 철령성 공방전 때 명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1만 명을 이끌고 왔으나 역습을 받고 전멸하였고,

예허는 1619년 8월 누르하치가 4만 병력으로 멸망시킵니다.

포로로 잡힌 강홍립이 광해군에게 보내는 밀서에 따르면

1619년 8월 19일 누르하치가 예허를 멸망시켰는데, 이번에도 주특기인 성동격서의 전력으로

요동을 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예허를 공격하였다고 합니다.

예허를 멸망시킨 후 수만 명의 예허 부족민들을 끌고 왔고, 예허 병력 9천을 팔기군에 나눠줬다고 합니다.

칼카 몽고의 자이사이는 1만 명을 이끌고 왔다가 만문노당에 의하면 모두 전멸하고 150여 명만 생포되었지요.

누르하치는 이중 140명을 고향으로 돌려보냈다고 하는데 

강홍립에 따르면 돌려보낸 사람은 누르하치의 첩의 친척이라 칼카 몽고를 모두 손아귀에 넣기 위해 포로를 풀어줬다고 합니다.



강홍립의 별록(別錄) 中

별록(別錄)에 이르기를, 

“8월 4일 하세국(河世國)이 오랑캐 사신과 더불어 만포(滿浦)로 간 후, 

 11월 밤중에 신등의 일행을 핍박하여 몰고 와서 자편성(者片城) 안에다 가두고 단단히 지키니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지금에야 요동 사람으로 항복해 온 자가 말하는데, 

 ‘조선 군사가 요동에 와 있다 하므로 이렇게 하는 것이라.’ 합니다. 

 8월 19일 누루하치가 군마를 거느리고 가서 북관(北關)을 함락했습니다. 

 이보다 앞서 그는 오랑캐 중에 떠도는 말이 10월 보름께는 요동으로 향하겠다 하더니 

 군사를 동원하게 되자 갑자기 북관으로 향했던 것입니다. 

 북관에는 원래 두 개의 성이 상대하여 있는데, 하나는 김태석(金台石)이 지키고, 하나는 백양고(白羊古)가 지키고 있었습니다. 

 성지(城池)가 험하고 견고하기는 개원(開元)ㆍ철령(鐵嶺)보다 10배나 더했습니다. 

 그런데 누루하치는 군사를 독촉하여 소가죽을 쓰고 화살과 돌을 막으면서 성을 뚫고 들어가는데 앞선 자가 죽거나 다치게 되면

 뒤따르는 자가 계속 진격했습니다. 

 그래서 성안에서는 버틸 수 없어 김태석은 스스로 불타 죽고, 백양고는 나와 항복했습니다. 

 그리고 두 성의 군졸과 경내(境內)의 부락들을 모두 몰고 나왔는데 무려 수만 명이나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얻은 장정의 군사들은 8명의 장수에게 나누어 붙이니 9천여 명이나 되었습니다. 

 전에 오랑캐들이 근심했던 바는 북관인데 지금 이미 파멸되니 대소(大小) 호인(胡人)들이 기뻐서 날뛰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말하기를, 

 ‘북관과 철령이 이와 같이 모두 격파되었으니 요동이 다시 무엇을 믿을 것인가.’ 합니다. 

 철령이 격파될 때 몽고의 재새(宰賽)가 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구원했으나 실패했습니다. 

 그리고 재새와 그의 두 아들과 부장(副將) 4명은 모두 체포되었는데, 부장 1명은 곧 누루하치의 아내 몽고 여자의 친척이라, 

 누루하치는 이로 인하여 재새의 부락민을 유혹 협박하여 소ㆍ양ㆍ낙타ㆍ말을 거두어 모아 길에 잇따랐는데, 

 형세가 모두 들어오게 된다고 하였습니다.


여하튼 1619년 8월

1583년 아버지 탘시의 죽음 이후 일족 닝우타 통합전을 거치고 1588년 건주위를 통일하였으며

해서여진을 차례로 멸망시키고 마침내 거병한지 36년 만에

금나라 멸망 이후 근 400여년 만에 다시 한번 여진족을 모두 하나로 통일하게 됩니다.


누르하치 여진을 통일하다! http://cafe.naver.com/booheong/115646

누르하치의 여진통일시 정복한 부족들 http://cafe.naver.com/booheong/130166


*태종 홍타이지 대에 그려진 태조전적도를 건륭제 대에 다시 그린 만주실록에는 동서가 바뀐 것을 모르고 주석을 달았습니다.

 만주실록의 대부분의 삽화도는 동서가 다릅니다. 이는 영고탑(닝우타)의 삽화도에도 나타나 있지요.

 이를 두고 긴타이시(김태시)가 동예허 국주, 부양워(백양고)가 서예허 국주로 혼동하기도 하나

 원초적 사서인 만문원당(구만주당)과 만문노당에는 서예허 국주가 긴타이시, 동예허 국주가 부양워로 되어 있습니다.


사서는 이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습니다.


<예허국은 그로부터 완전히 멸망했다.

 1619년 그해 만주국의 태조 겅옌한은 동해로부터 서쪽 대명국 요동의 변경에까지

 북쪽 몽고국의 코르친이 사는 끝의 눤강으로부터 남쪽 조선국의 변경에 가까이까지

 하나의 여진말을 쓰는 나라를 모두 싸우며 항복시키고 하나로 통일하였다>


-끝-


덧글

  • 영악한 사냥꾼 2019/03/11 21:04 #

    9부족 전투 후에 가까이 있는 하다, 호이파 잡아먹고, 그후에 동해여진 세력전을 펼치다가 우라 먹어치우고, 마지막으로 남은 게 예허였죠. 예허 먹으면서 여진은 일통.

    몽골은 동쪽초원에 차하르부가 있는데, 징기스탄의 성골부족이고, 차하르 예하에 동남쪽에 칼카, 동북쪽에 코르친이 있었죠. 코르친은 누르하치네랑 친해서 나중까지 가장 후대받은 부족이고.

    일단 지금은 예허랑 칼카까지 정리했군요. 나중에 차하르 치고 대칸 인장 획득은 홍타이지의 몫일테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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