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사 고종 국역 29부-한세충이 온다! 송사 번역

안녕하세요. 길공구입니다.

송사 휘종, 흠종 본기를 국역하였는데요, 틈틈히 남송 1대 황제 고종의 본기도 국역코자 합니다.


01부-천하병마 대원수부를 열고 근왕병을 이끌다!

02부-북송멸망&괴뢰국 대초&근왕병 백만명

03부-강왕에게 몰려드는 북송의 신하들

04부-남송(南宋) 건국

05부-무너진 나라를 재정비하다.

06부-대초 황제 장방창을 참역죄로 유배보내다!

07부-96만 명의 군인을 편성하다

08부-고종<중원에 남아 금과 결전하겠노라!>

09부-휘종<아들아 나를 구해다오>

10부-충의지사 유생을 죽이다.

11부-계속되는 반란과 금의 재침공

12부-장방창 사사와 악비의 등장

13부-걷잡을 수 없는 반란군과 도주하는 고종

14부-반란군을 선참후계하라!

15부-파죽지세 금군의 재침과 반란군 진압

16부-다시 무너지는 송나라

17부-황제여 개봉으로 돌아오소서!

18부-지방관에게 편의종사권을 부여하다

19부-패착! 문가사에서 대패하다

20부-불가피한 화전양면책

21부-전함을 건조하라!

22부-도하!도하!도하! 종택 죽다!

23부-고려 인종<여진족은 수전에도 능하다!>

24부-양산박 송강의 부하 사빈을 죽이다.

25부-고종 코앞까지 닥친 금나라 군

26부-풍전등화! 마지막 보루가 무너지다.

27부-전광석화 같은 고종의 도주와 불타는 양주성

28부-묘부의 군사 쿠데타!<황제는 폐위되셨소이다!>


송사 흠종 조환 국역 1부~17부


송사 고종 원문 출처 : 


사전 보고 번역하는 것이라, 오역이 많습니다.
수정할 부분 알려 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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賜傅、正彥鐵券。
呂頤浩、張浚傳檄中外討傅、正彥,執黃大本下獄。
乙巳,太后降旨睿聖皇帝處分兵馬重事。
張俊率兵發平江,劉光世繼之。
丙午 ,張浚同知樞密院事,翰林學士李邴、御史中丞鄭鐧並同簽書樞密院事。
呂頤浩、張浚發平江。
丁未,次吳江,奏乞建炎皇帝還即尊位。
朱勝非召傅、正彥至都堂議復辟,傅等遂朝睿聖宮。
金人陷京東諸郡,劉洪道棄青州去。
撻懶以劉豫知東平府、節制河南州郡。
趙立復徐州。
夏四月戊申朔,太后下詔還政,皇帝復大位。
帝還宮,與太后御前殿垂簾,詔尊太后為隆祐皇太后
己酉,詔訪求太祖神主。
以苗傅為淮西制置使,劉正彥副之。
묘부(傅)와 유정언(正彥)에게 철권(鐵券/공신에게 면사권 등을 적어 내려주던 서책)을 하사(賜)하였다.
여이호(呂頤浩)와 장준(張浚)이 중외(中外/천하)에 묘부(傅)와 유정언(正彥)의 토벌(討)을 전격(傳檄/격문을 돌림)하였고,
황대본(黃大本)을 집(執/사로잡음)하여 하옥(下獄)하였다.
을사일(乙巳)에, 태후(太后)가 항지(降旨/교지를 내림)하여 
예성황제(睿聖皇帝/고종)가 병마(兵馬)가 중사(重事/중대한 정사)를 처분(處分/처리하여 다룸)하게 하였다.
장준(張俊)이 솔병(率兵/병력을 인솔함)하여 평강(平江)을 출발(發)하였고, 유광세(劉光世)가 계지(繼之/뒤를 이음)하였다.
병오일(丙午)에, 장준(張浚)을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로 삼고, 
한림학사(翰林學士) 이병(李邴)과 어사중승(御史中丞) 정간(鄭鐧)을 나란히 동첨서추밀원사(同簽書樞密院事)로 삼았다.
여이호(呂頤浩)와 장준(張浚)이 평강(平江)을 출발(發)하였다.
정미일(丁未)에, 오강(吳江)에 차(次/머묾)하였고, 
건염황제(建炎皇帝/고종)가 존위(尊位/제위)에 환즉(還即/다시 즉위함)하라 주걸(奏乞/상소를 올려 호소함)하였다.
주승비(朱勝非)가 묘부(傅)와 유정언(正彥)을 소환(召)하여 
도당(都堂)의 복벽(復辟/물러났던 임금이 다시 임금 자리에 오름)를 의논(議)하였는데,
묘부(傅) 등(等)이 마침내 예성궁(睿聖宮)으로 조(朝/임금을 배알함)하였다.
금인(金人)이 경동(京東)의 제군(諸郡/여러 군)을 함락(陷)하였고, 유홍도(劉洪道)는 청주(青州)를 기(棄/버림)하고 가버렸다.
달라(撻懶/목종 영가의 장남 완안창)는 유예(劉豫)를 지동평부(知東平府) 및 절제하남주군(節制河南州郡)으로 삼았다.
조립(趙立)이 서주(徐州)를 수복(復)하였다.
여름 4월 초하루 무신일(戊申)에, 태후(太后)가 환정(還政/수렴청정을 다시 거두어들임)을 하조(下詔/조서를 내림)하였고,
황제(皇帝)가 대위(大位/제위)를 회복(復)하였다.
황제(帝)가 환궁(還宮)하였고, 태후(太后)가 어전전(御前殿/정전, 대전)에 수렴(垂簾/발을 드리움)을 여(與/베풂)하였고,
조(詔)하여 존(尊)하여 태후(太后)를 융우황태후(隆祐皇太后)로 하였다.
기유일(己酉)에, 조(詔)하여 태조(太祖)의 신주(神主)를 방구(訪求/사람을 널리 찾아 구함)하였다.
묘부(苗傅)를 회서제치사(淮西制置使)로 삼았고, 유정언(劉正彥)을 부사(副)로 삼았다.
 


1129년 3월 25일 묘부와 유정언에게 철권(공신에게 면사권 등을 적어 내려주던 서책)을 하사하였다.

여이호와 장준(문관)이 천하에 묘부와 유정언을 토벌하자 격문을 돌렸고 황대본을 사로잡아 하옥하였다.

3월 27일에 태후가 교지를 내려 예성황제(고종)가 병마의 중대한 정사를 처리하여 다루게 하였다.

장준(무관)이 병력을 인솔하여 평강을 출발하였고 유광세가 뒤를 이었다.

3월 28일 장준(문관)을 동지추밀원사로 삼고, 한림학사 이병과 어사중승 정간을 나란히 동첨서추밀원사로 삼았다.

여이호와 장준(문관)이 평강을 출발하였고, 3월 29일에는 오강에 머물렀고, 

건염황제(고종)가 제위에 다시 즉위하라 상소를 올려 호소하였다.

주승비가 묘부와 유정언을 소환하여 도당의 고종의 복위를 의논하였는데 묘부 등이 마침내 예성궁으로 가 고종을 배알하였다.

금나라 군이 경동의 여러 군을 함락하였는데, 유홍도는 청주를 버리고 가버렸다.

달라(목종 영가의 장남 완안창)는 유예를 지동평부 및 절제하남주군으로 삼았다.

조립이 서주를 수복하였다.

여름 4월 01일에 태후가 조서를 내려 수렴청정을 거두고 황제가 제위를 회복하였다.

황제가 환궁하였고 태후가 대전에서 수렴을 베풀고 조서를 내려 태후를 높여 융우황태후로 하였다.

4월 02일에 조서를 내려 태조의 신주를 널리 찾아 구하였다.

묘부를 회서제치사로 삼았고 유정언을 부사로 삼았다.


요약.

1129년 3월 금나라에 쫓겨 임시수도 항주에 온 지 한 달도 채 안돼 묘부의 군사 쿠데타가 발생한다.

묘부는 태후를 위협하여 고종을 강왕, 조부를 황태질로 폐위한다.

한편 금나라를 방비하기 위해 북진해 있던 장수들이 잇달아 묘부가 보낸 사신을 참하고 수도로 남진한다.

묘부는 장군들에게 벼슬을 남발하였으나 장군들의 남진이 멈추질 않자 고종을 찾아가 장군들과의 화친을 중재해 달라고 청한다.

고종은 폐위당한 임금이라며 이를 거부한다.

묘부는 태후를 통해 고종의 복위를 추진하고 사형을 면하는 철권을 강제로 받아낸 묘부는 

1129년 4월 1일 고종의 복위를 선포한다.

한편 드디어 한세충과 유광세의 군대가 항주 인근에 도착한다.


-30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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