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사 고종 국역 33부-유일한 황태자가 죽다! 송사 번역

안녕하세요. 길공구입니다.

송사 휘종, 흠종 본기를 국역하였는데요, 틈틈히 남송 1대 황제 고종의 본기도 국역코자 합니다.


01부-천하병마 대원수부를 열고 근왕병을 이끌다!

02부-북송멸망&괴뢰국 대초&근왕병 백만명

03부-강왕에게 몰려드는 북송의 신하들

04부-남송(南宋) 건국

05부-무너진 나라를 재정비하다.

06부-대초 황제 장방창을 참역죄로 유배보내다!

07부-96만 명의 군인을 편성하다

08부-고종<중원에 남아 금과 결전하겠노라!>

09부-휘종<아들아 나를 구해다오>

10부-충의지사 유생을 죽이다.

11부-계속되는 반란과 금의 재침공

12부-장방창 사사와 악비의 등장

13부-걷잡을 수 없는 반란군과 도주하는 고종

14부-반란군을 선참후계하라!

15부-파죽지세 금군의 재침과 반란군 진압

16부-다시 무너지는 송나라

17부-황제여 개봉으로 돌아오소서!

18부-지방관에게 편의종사권을 부여하다

19부-패착! 문가사에서 대패하다

20부-불가피한 화전양면책

21부-전함을 건조하라!

22부-도하!도하!도하! 종택 죽다!

23부-고려 인종<여진족은 수전에도 능하다!>

24부-양산박 송강의 부하 사빈을 죽이다.

25부-고종 코앞까지 닥친 금나라 군

26부-풍전등화! 마지막 보루가 무너지다.

27부-전광석화 같은 고종의 도주와 불타는 양주성

28부-묘부의 군사 쿠데타!<황제는 폐위되셨소이다!>

29부-한세충이 온다!

30부-수도 탈환!

31부-한세충의 위용에 놀라 유정언 말에서 떨어지다!

32부-왕안석vs사마광 평가가 뒤집히다


송사 흠종 조환 국역 1부~17부

송막기문 1부~5부


송사 고종 원문 출처 : 


사전 보고 번역하는 것이라, 오역이 많습니다.
수정할 부분 알려 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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秋七月戊寅,贈王復為資政殿學士。
己卯,親慮囚。
辛巳,苗傅、劉正彥伏誅。
癸未,進韓世忠檢校少保、武勝昭慶軍節度使、禦營使司都統制。
范瓊自洪州入朝,以瓊為禦營使司提舉一行事務,後軍統制辛企宗為都統制。
命學士院草夏國書、大金國表本付張浚。
甲申,詔以苗、劉之變,當軸大臣不能身衛社稷,朱勝非、顏岐、路允迪並落職,張澂衡州居住。
以知廬州胡舜陟為淮西制置使,知江州權邦彥兼本路制置使。
金人犯山東,安撫使劉洪道棄濰州遁,萊州守將張成舉城降。
丁亥,以範瓊跋扈無狀,收下大理獄,分其兵隸神武五軍。
皇太子薨,諡元懿。
戊子,鄭鐧薨。
己丑,以資政殿大學士王綯參知政事,兵部尚書周望同簽書樞密院事。
庚寅,仙井監鄉貢進士李時雨上書,乞選立宗子系屬人心,帝怒,斥還鄉里。
辛卯,升杭州為臨安府。
壬辰,言者又論範瓊逼遷徽宗及迎立張邦昌,瓊辭伏,賜死,子弟皆流嶺南。
劉洪道復青州,執金守向大猷。
乙未,遣謝亮使夏國。
丁酉,遣崔縱使金軍前。
庚子,張浚發行在。
辛丑,王曁燮與靳賽遇,合戰,敗績。
壬寅,命李邴、滕康權知三省、樞密院事,扈從太后如洪州,楊惟忠將兵萬人以衛。
以杜充同知樞密院事兼宣撫處置副使。
乙巳,詔江西、閩、廣、荊湖諸路團教峒丁、槍杖手。
山東賊郭仲威陷淮陽軍。
翟興引兵入汝州,與賊王俊戰,敗之。
가을 7월 무인일(戊寅)에, 왕복(王復)을 추증(贈)하여 자정전학사(資政殿學士)로 삼았다.
기묘일(己卯)에, 친히(親) 여수(慮囚/천재지변시 죄수를 사면함)하였다.
신사일(辛巳)에, 묘부(苗傅)와 유정언(劉正彥)을 복주(伏誅/형을 내려 죽임)하였다.
계미일(癸未)에, 한세충(韓世忠)을 검교소보(檢校少保)와 무승소경군(武勝昭慶軍) 절도사(節度使)와
어영사사도통제(禦營使司都統制)로 진(進/관직을 올림)하였다.
범경(范瓊)이 홍주(洪州)로부터 입조(入朝/조정에 들어옴)하였고, 
범경(瓊)을 어영사사제거일행사무(禦營使司提舉一行事務)로 삼았고,
후군통제(後軍統制) 신기종(辛企宗)을 도통제(都統制)로 삼았다.
명(命)하여 학사원(學士院)에서 초안(草)한 하국(夏國)의 서신(書)과 대금국(大金國)의 표본(表本)을 
장준(張浚)에게 부(付/줌)하였다.
갑신일(甲申)에, 조(詔)하여 묘부(苗)와 유정언(劉)의 변(變)으로써,
당축(當軸/관부의 주요한 지위, 당국)의 대신(大臣)이 사직(社稷)을 신위(身衛/몸을 바쳐 지킴)함이 불능(不能)하였고,
주승비(朱勝非)와 안기(顏岐) 및 노윤적(路允迪)을 모두 낙직(落職/파직)하고,
장징(張澂)은 형주(衡州)에 거주(居住)하게 하였다.
지여주(知廬州) 호순척(胡舜陟)을 회서제치사(淮西制置使)로 삼고, 
지강주(知江州) 권방언(權邦彥)을 본로제치사(本路制置使)를 겸(兼)하게 하였다.
금인(金人)이 산동(山東)을 범(犯)하였고, 안무사(安撫使) 유홍도(劉洪道)는 유주(濰州)를 기(棄/버림)하고 둔(遁/달아남)하였고,
내주(萊州)의 수장(守將) 장성(張成)은 거성(舉城/성을 들어 올림)하여 항복(降)하였다.
정해일(丁亥)에, 범경(範瓊)이 발호(跋扈/제멋대로 날뜀)하고 무상(無狀/아무렇게나 함부로 굴어 버릇이 없음)하였는데,
대리옥(大理獄/형옥)에 수하(收下/거두어 가둠)하였고, 그 병(兵)을 분(分/나눔)하여 신무오군(神武五軍)에 예속(隸)하였다.
황태자(皇太子)가 훙(薨)하였는데, 시호(諡)는 원의(元懿)이다.
무자일(戊子)에, 정간(鄭鐧)이 훙(薨)하였다.
기축일(己丑)에, 자정전대학사(資政殿大學士) 왕도(王綯)를 참지정사(參知政事)로,
병부상서(兵部尚書) 주망(周望)을 동첨서추밀원사(同簽書樞密院事)로 삼았다.
경인일(庚寅)에, 선정감(仙井監) 향공진사(鄉貢進士) 이시우(李時雨)가 상서(上書/상소를 올림)하였는데,
종자(宗子/종실)와 계속(系屬/관계된 혈족)의 인심(人心/사람됨)을 선립(選立/선택하여 세움)하라 걸(乞/바람)하니,
황제(帝)가 노(怒)하였고, 향리(鄉里/고향)로 척환(斥還/물리쳐 돌려보냄)하였다.
신묘일(辛卯)에, 항주(杭州)를 승격(升)하여 임안부(臨安府)로 하였다.
임진일(壬辰)에, 언자(言者/언관)가 또 범경(範瓊)이 휘종(徽宗)을 핍천(逼遷/핍박하여 옮기게 함)한 것과 
더불어 장방창(張邦昌)을 영립(迎立/맞아들여 임금으로 세움)한 것을 논(論)하였는데,
범경(瓊)이 사복(辭伏/자복)하니, 사사(賜死/죽음을 내림)하였고,
자제(子弟/아들)는 모두 영남(嶺南)으로 유배(流)하였다.
유홍도(劉洪道)가 청주(青州)를 수복(復)하였고, 금수(金守/금나라 장수) 향대유(向大猷)를 집(執/사로잡음)하였다.
을미일(乙未)에, 사량(謝亮)을 하국(夏國)에 사신(使)으로 보냈다.
정유일(丁酉)에, 최종(崔縱)을 금(金)의 군전(軍前/군영)에 사신(使)으로 보냈다.
경자일(庚子)에, 장준(張浚)이 행재(行在/임금이 있는 곳)를 출발(發)하였다.
신축일(辛丑)에, 왕기섭(王曁燮)이 근새(靳賽)와 더불어 조우(遇)하였는데,
합전(合戰/더불어 싸움)하였으나, 패적(敗績/패전)하였다.
임인일(壬寅)에, 명(命)하여 이병(李邴)과 등강(滕康)을 권지삼성(權知三省)과 추밀원사(樞密院事)로 삼아,
태후(太后)를 호종(扈從)하여 홍주(洪州)로 가게 하였고,
양유충(楊惟忠)은 병(兵) 만인(萬人)을 장(將/인솔함)하여 이로써 호위(衛)하였다.
두충(杜充)을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 겸(兼) 선무처치부사(宣撫處置副使)로 삼았다.
을사일(乙巳)에, 조(詔)하여 강서(江西)와 민(閩) 및 광(廣)과 형호(荊湖)의 제로(諸路/여러 지역)은
동정(峒丁)과 창장수(槍杖手/장창병)를 단교(團教/가르치고 조직함)하게 하였다.
산동(山東)의 적(賊) 곽중위(郭仲威)가 회양군(淮陽軍)을 함락(陷)하였다.
적흥(翟興)이 인병(引兵/병력을 이끎)하여 여주(汝州)로 들어갔고,
적(賊) 왕준(王俊)과 더불어 싸웠고, 패(敗/깨트림)하였다.

*군벌 범경(范瓊) 제거
 : 고종이 남경에서 즉위할 당시 범경은 온주 관찰사였는데 병력을 이끌고 홍주에서 고종을 알현하였다.
   이후 범경은 독자적인 부대를 이끌었는데 범경은 매우 거만하였고 
   부하들 또한 난폭하여 지방의 장관을 임의대로 죽이기도 하였다.
   묘부의 쿠데타를 지지하였고 한세충에 의해 쿠데타가 실패로 돌아가자 묘부의 사면을 고종에게 요청하기도 하였다.
   고종은 범경의 군대가 수도에서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범경의 관직을 더 올려주었다.
   고종은 장준(무관)에게 범경을 처단하라 밀명을 내렸는데 장준이 군사회의가 있다면서 범경을 군영으로 불렀다.
   장준, 유광세가 범경과 식사를 마친 직후 고종의 교지를 받은 유자우가 도착하여 범경에게 황명을 받으라고 말한다.
   범경이 무릎을 꿇자 유자우는 고종의 교지를 읽어 내려갔고 곧바로 좌우에게 명하여 범경을 체포하게 한다.
   장준은 군사로 범경을 호위하여 감옥으로 보냈고 
   유광세는 범경의 부대로 가 범경의 부하들에게 사면령을 내리고 무장을 해제한다.
   범경은 곧 처형되었다.

1129년 7월 02일에 왕복을 추증하여 자정전학사로 삼았다.
7월 03일에 친히 죄수를 사면하였다.
7월 05일에 묘부와 유정언을 처형하였다.
7월 07일에 한세충을 검교소보, 무승소경군 절도사, 어영사사도통제로 올렸다.
범경이 홍주로부터 조정에 들어왔는데 범경을 어영사사제거일행사무로 삼았고, 후군통제 신기종을 도통제로 삼았다.
명을 내려 학사원에서 초안한 하국의 서신과 대금국의 표본을 장준(문관)에게 주었다.
7월 08일에 조서를 내려 묘부와 유정언의 변 당시 조정의 대신으로 사직을 목숨 걸고 지키지 않았다 하여
주승비, 안기, 노윤적을 모두 파직하고 장징은 형주에 유배 보냈다.
지여주 호순척을 회서제치사로 삼고, 지강주 권방언을 본로제치사를 겸하게 하였다.
금나라 군이 산동을 범하였는데 안무사 유홍도는 유주를 버리고 달아났고 내주의 수장 장성은 성을 바쳐 항복하였다.
7월 11일에 범경이 발호하고 전횡을 일삼았다는 죄목으로 형옥에 가두고 그 휘하 군대를 나누어 신무오군에 예속하게 하였다.
황태자가 훙하였는데 시호는 원의다.
7월 12일에 정간이 훙하였다.
7월 13일에 자정전대학사 왕도를 참지정사로, 병부상서 주망을 동첨서추밀원사로 삼았다.
7월 14일에 선정감 향공진사 이시우가 상소를 올려 종실과 혈족의 사람됨을 골라 황태자로 삼으라 애걸하니
황제가 노하였고 고향으로 물리쳐 돌려보냈다.
7월 15일에 항주를 올려 임안부로 하였다.
7월 16일에 언관이 또 범경이 휘종을 핍박하여 금나라로 옮기게 한 것과 더불어 
장방창을 맞아들여 임금으로 세운 죄를 논하였는데, 범경이 자복하니 죽음을 내리고 아들은 모두 영남으로 유배하였다.
유홍도가 청주를 수복하였고 금나라 장수 향대유를 사로잡았다.
7월 19일에 사량을 하국에 사신으로 보냈다.
7월 21일에 최종을 금나라 군영에 사신으로 보냈다.
7월 24일에 장준(문관)이 행재(임금이 있는 곳)를 출발하였다.
7월 25일에 왕기섭이 근새와 조우하여 더불어 싸웠으나 패전하였다.
7월 26일에 명을 내려 이병과 등강을 권지삼서과 추밀원사로 삼아 태후를 호종하여 홍주로 가게 하였고
양유충에게 병력 1만을 인솔하여 호위하게 하였다.
두충을 동지추밀원사 겸 선무처치부사로 삼았다.
7월 29일에 조서를 내려 강서, 민, 광, 형호의 여러 지역은 동정(峒丁)과 창장수(장창병)를 훈련시키게 하였다.
산동의 반란군 곽중위가 회양군을 함락하였다.
적흥이 병력을 이끌고 여주로 들어가 반란군 왕준과 더불어 싸웠고 깨트렸다.

요약.
1129년 7월 마침내 묘부와 유정언을 사지를 찢어 죽였다.
고종은 묘부의 난 당시 조정에 있던 대신들을 목숨 바쳐 사직을 구하지 않았다는 죄명으로 파직한다.
고종은 항주를 임안으로 승격한다.
고종은 금나라와 서하에 사신을 보내 화친을 모색한다.
융우태후는 금나라 군의 남진에 대비해 군사 1만 명을 데리고 홍주로 옮긴다.
한편 이달에 고종의 유일한 아들 황태자 조부가 병사한다.
이로써 송 태종의 적통은 고종대에서 끊기게 되었다.
황태자가 죽은 지 3일도 안돼 향공진사 이시우는 상소를 올려 황족 중에서 황태자를 삼으라고 청하였다가
고종의 분노를 사게 된다.

*남송이 태종계에서 태조계로 바뀌게 되는 첫 Start!!! http://cafe.naver.com/booheong/151602
 

-34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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