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금<한문을 알아 사형을 면한 다하이> 누르하치 관련 이야기

일전에 누르하치의 건주위에는 한문을 아는 자가 거의 없었다는 글을 소개해 드린 적이 있었지요.


후금 만주족으로 군대를 안 가는 방법 http://cafe.naver.com/booheong/138391

한자를 조금 아는 홍 타이지 http://cafe.naver.com/booheong/135616


1595년 건주위를 방문한 하세국과 신충일은 건주에 한문을 아는 자가 1명 밖에 없었다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하세국의 보고서 조선왕조실록 1595년 11월20일 기사中

문학 외랑(文學外郞)은 중국 사람으로서 오랑캐 땅에 투속(投屬)한 지가 거의 30여년이나 되었는데, 

모든 통서(通書)하는 일을 이 사람이 오로지 맡아서 한다고 하였다. 


신충일의 보고서 조선왕조실록 1596년 1월 30일 기사中

왜내는 본래 명나라 사람인데 노추의 집에 와서 문서를 관장한다고 하나 문리를 통하지 못하였습니다. 

이 밖의 사람들도 글을 아는 자가 없었고, 또 글을 배우는 자도 없었습니다.


여기서 언급되는 문학외랑, 왜내는 동일인으로 보입니다. 

1565년경에 건주로 온 이후 누르하치 밑에서 모든 한문 문서를 담당하였다는 내용이지요.

당시 건주는 1596년 누르하치가 어르더니 밬시와 가가이에게 만주문을 창제하라 지시할 때까지

몽고문을 사용하였습니다.

당연히 만주어를 몽고어로 통역한 이후에 몽고문을 작성하였지요.

즉 어르더니와 가가이는 만주어, 몽고어, 몽고문에 통달하였고 여진족 내의 문서나 몽고족과의 통서를 담당하였습니다.

명이나 조선의 경우에는 왜내가 모든 문서를 담당하였지요.


이러던 것이 1620년 경으로 가면 당시 후금에 한문을 아는 자는 여전히 극소수였고

조선의 기록에 따르면 만주명 다하이(dahai), 조선에 기록된 한문으로는 동대해(董大海)와 유해(劉海)라는

한족이 모든 한문 문서를 담당하고 있었습니다.


1619년 3월 강홍립의 밀계中

오랑캐의 문서는 요동 사람 동대해(董大海)와 유해가 전담하였으나, 문자에 익숙하지 않아 아군이 오자, 

“글을 알고 일을 아는 사람이 있는가?” 하니,

“오지 않았다.”고 대답하였다. 


강홍립 호중일기(胡中日記) 中

요즈음 만주(滿住)는 여러 아들과 여러 장수들과 날마다 교련장(敎鍊場)에 가서 훈련하는 것을 보고, 

성안 집집마다 기계를 정련(精鍊)하고 있었다. 

들으니 오래지 않아 요동을 침범한다고 한다. 호병(胡兵)으로 성에 출입하는 자는 3ㆍ4만 기이며, 

나머지는 외처(外處)를 방어한다고 한다. 

그 수효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국중(國中)의 군대를 8분(分)하여 추장과 귀영개가 각각 4분씩 거느린다고 한다. 

이 사이의 문서는 요인(遼人) 동대해(董大海)와 유해(劉海)가 오로지 관장하는데, 문자를 잘 몰라 매우 엉성하다. 

우리 군대가 여기에 이른 후에 문자를 해득하는 자가 있느냐고 묻기에, “그런 사람은 오지 않았다.”고 답하였다. 

(중략)

동대해(董大海)ㆍ유해(劉海)의 문필이 지극히 졸렬해서 회답 서신에는 보통의 글자를 써야 겨우 해득하였다. 


이민환의 보고서 건주견문록(建州聞見錄) 中

오랑캐들은 단지 몽서(蒙書/몽고 문서, 만주문)만 아는데,

무릇 문부(文簿/문서와 장부)는, 모두 몽자(蒙字/몽고 문자, 만주문)로써 기록(記)한다.

만약(若) 아국(我國/조선)과 통서(通書/서신을 통함)할 때에는,

곧 먼저 몽자(蒙字/몽고 문자, 만주문)로써 기초(起草/글의 초안을 잡음)하고,

후(後)에 화인(華人/중국인)이 문자(文字)로써 번역(譯)한다.

듣기로 오랑캐 장수 중(中)에, 오직 홍대시(紅歹是/홍 타이지)만 겨우 식자(識字/글자를 앎)한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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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당시 다하이는 한문과 중국어 및 만주문과 만주어가 가능한 자였습니다.

당시 요동에서 많은 한족을 포로로 노비로 잡아왔으나 만주어와 한문을 아는 자는 거의 없었나 봅니다.

여하튼 중국어, 만주어, 한문, 만주문이 가능한 다하이는 1620년 아주 큰일을 벌이게 됩니다.

바로 누르하치으로부터 푸진(부인) 칭호를 받는 나자라는 여자와 간통을 저지른 것이었습니다.


만문노당 1620년 3월 25일 기사中

한(누르가치)의 정원 안의 몸 가까이 부리는 킨타이라는 한 여자가 나자라는 한 여자와 다투며

나자가 킨타이에게

   <너는 음탕하다! 농쿠와 간통하였다!>

라고 욕하니 킨타이가 나자에게

   <내가 농쿠와 어디에서 간통하였느냐? 간통하고 얼마나 줬느냐?

     너야말로 다하이 밬시와 간통하고 비단 2필을 주지 않았느냐?>

하며 하는 말을 한(누르가치)의 작은 아내 타인차가 듣고서 한(누르가치)에 3월 25일에 알렸다.

그 말을 듣고 한(누르가치) 조사하여 나자 푸진(부인)에 물으니

   <비단 2필을 다하이에 준 것이 사실이다!>


그렇습니다. 다하이 밬시는 누르하치에게 부인 칭호를 받는 나자와 간통하고 비단 2필을 화대로 받은 것이었지요.

나자가 누르하치의 첩인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우선 알려진 누르하치의 16명의 아내에는 명단이 없습니다.

실상 누르하치의 첩 중에 기록에 안 나온 이도 있는데 

1600년 누르하치가 하다를 멸하고 국주 멍어불우를 건주(만주)에 억류하였는데,

이때 멍어불우가 누르하치의 첩과 간통하는 일이 벌어져 누르하치는 첩과 멍어불우를 모두 처형한 전례가 있었습니다.


한편 만주어 푸진[fujin]은 한문 음차로는 복진(福晉)이며 뜻은 부인(夫人)이지요.

누르하치 당시에는 누르하치의 부인들이나 인척들의 부인들 혹은 신분이 높은 버이러에 관련된 부인들에 대해서 

이 칭호를 사용하였습니다.

훗날 청 개국 후의 푸진은 친왕, 세자, 군왕의 처첩을 봉작하는 외명부 작위로 사용되었지요.


여하튼 다하이는 누르하치와 가까운 여자와 간통한 것은 사실입니다.

게다가 나자한테 비단도 화대로 받았지요.

아마 목이 열 개라도 남아나질 않을 것 같은데요.

그러나 그에게는 아무도 가지지 못한 무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한문(漢文)!!!


만문노당 1620년 3월 기사中

다하이와 나자를 모두 사형 죄에 판결하였다.

한(누르가치) 고려하며 생각하고

   <여자와 남자 모두 죽일 죄 사실이다.

    남자를 죽일 때에 또 그처럼 한족 글 이해하고 한족 말을 이해하고 아는 사람 없다!>

하며 생각하고 나자를 죽였다.

다하이를 하며 밧줄 묶어서 기둥에 묶어 두었다.


나자는 처형하고 다하이는 단지 기둥에 며칠 묶어두는 벌만 내렸던 것이었습니다.

이유는 만주어를 쓰는 사람 중에 다하이 만큼 한문과 중국어를 아는 사람이 없다는 이유에서였지요.


다하이는 이후에도 승승장구하여 홍 타이지가 정권을 잡은 이후에도 밬시 칭호를 받으며

유권점 만주문 창제에도 큰 공을 세우게 됩니다.


다하이는 조선 통역관 출신의 반역자 정명수(鄭命壽)와도 같이 근무하였습니다.

웹툰 칼부림에서 한쪽 눈을 잃은 통역관이 정명수이라는 말도 있던데요.

여하튼 당시 만주에서는 만주어를 기본적으로 하고 다른 언어를 구사하면 사형죄도 면할 수 있을 정도로 우대받은 것 같습니다.


-끝-


P.S) 이 간통 사건은 나비효과로 후금의 4대 버이러 중 다이샨, 홍 타이지, 망월타이 타이지에게

     엄청나게 큰일이 벌어지게 됩니다.

     후금 2대 한의 후계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칠 일이 곧이어 벌어지게 되기 때문이지요.

P.S2) 나자와 킨타이의 싸움을 들어보면 화대를 남자가 받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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