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르하치와 조선의 소금 무역, 그리고 조선의 정찰력 누르하치 관련 이야기

누르하치의 만주(건주)는 바다를 접하지 않은 내륙이었습니다.

하여 소금이 매우 귀하였는데 기록을 살펴보면 조선에서 들여오는 소금을 종이와 더불어

매우 중시하였습니다.

명도 소금 무역을 매우 엄격하게 처리하였으므로 누르하치는 조선과의 소금 무역을 매우 오래전부터 희망하여 왔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596년 4월 26일 기사中

평안도 관찰사 윤승길(尹承吉)이 치계하기를,

“우후(虞候) 김종득(金宗得)이 만포진 가장(滿浦鎭假將)으로 나갔는데 

 본월 9일 호인(胡人) 2명이 강변에 이르러 왔기에 온 이유를 물으니, 답하기를,

 ‘노을가적(老乙可赤)의 차장(次將)인 마신(馬臣)의 가정(家丁) 동평고(童坪古)와 

 소을가적(小乙可赤)의 차장인 동모은류(童毛隱流)의 가정 동랑조호(童郞照好) 등이 

 강아지를 가지고 소금을 무역하는 일로 왔다.’고 하기에


→ 임진왜란 중에도 누르하치가 소금을 무역하기 위해 만포에 사람을 보냈네요.



조선왕조실록 1608년 8월 16일 기사中

비변사가 함경 감사 장만(張晩)의 진폐 차자(陳弊箚子)에 대하여 회계하기를,

“함경도는 

〈관동과 이어진 지역으로 곧 삼국 시대 신라의 경계입니다. 정몽주(鄭夢周)의 연자루기(燕子樓記)에서도 참고할 수 있거니와, 

 신라 성덕왕의 순수비(巡狩碑)도 아직 황초령(黃草嶺)에 남아 있어 사적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는 고구려의 땅이었다고도 하는데, 이는 신라 중엽 이후로 고구려에 편입되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지대가 북쪽으로 아주 멀리 떨어져 있어서 기후가 몹시 춥고 토지가 척박한데다, 

또 호인(胡人)의 부락과 강 하나만을 사이에 두고 있습니다. 

생활의 어려움이란 이루 형언할 수 없지만, 그러나 여느 때는 번호(藩胡)와 고기 및 소금을 무역하여 입에 풀칠을 하여 왔는데

지금에 와서는 호인의 부락마저 다 비고 초서(貂鼠) 따위의 물건을 매매할 길이 없어서 떠돌며 고생하는 모양이 

날이 갈수록 더 심각합니다.


→ 함경도의 백성들이 여진족과의 소금과 담비 가죽 무역으로 먹고살았다는 기사입니다.

   누르하치가 동해여진을 공격하고 여진족들을 모두 건주(만주)로 끌고 가면서

   조선의 동북방 여진족들이 텅텅 비어 무역이 끊겼다는 내용입니다.



조선왕조실록 1609년 9월 21일 기사中

함경 감사 장만(張晩)이 치계하기를,

(중략)

노추가 싸움에서 패했다는 말은 육진(六鎭) 모든 곳에서 지금까지 이런 말을 보고해 온 곳이 없는데, 

이 오랑캐가 그 전쟁에 패한 날짜까지 분명히 말하였으니, 

이는 교활한 오랑캐가 소금과 쌀을 얻기 위해 이렇게 와서 알리는 것이거나, 

혹 늦가을 말이 살찌는 계절에 은근히 남쪽으로 내려와 목축을 할 생각에 미리 이 말을 해서 

우리의 방비를 늦추고자 하는 것인지, 헤아리기 매우 어렵습니다.


→ 누르하치가 1609년에도 소금 무역을 원하는 것이라고 조선은 판단하고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620년 4월 15일 기사中

강홍적이 강홍립에게 편지 보내는 일은 노추와의 일에 상관없다

답하기를,

“홍적 등이 홍립에게 편지를 보내는 일이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작년에도 이와 같이 하였다.〉 

 이것은 오랑캐의 편지에 답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언문 편지만 가지고 가면 두 역관을 반드시 

 데리고 가지 않을 것이다. 진실로 의리에 어긋나는 일이 아니면, 비록 편지를 보내게 하더라도 

 안 될 것은 없을 듯하다. 

 의당 상국(上國)이 지금 쌀과 소금을 오랑캐에게 준 일로 우리 나라를 힐책하고 

 사문(査問)하기 위해 차관(差官)이 자주 온다고 하면, 

 저 적(賊)들은 이 말을 듣고 또한 반드시 귀를 기울일 것이다. 

 만약 다만 언문 편지만 보낸다면 반드시 듣지 않을 것이니, 다시 더 충분히 논의하라.”

하였다.


→ 사르후 전투 이후 광해군은 혹 명나라에서 조선이 누르하치에게 소금을 보냈다고 뭐라 할까 봐 전전긍긍하고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620년 4월 18일 기사中

전교하기를,

“지난 겨울 오랑캐 사신이 돌아갈 때에 또한 유감을 품고 돌아갔다고 한다. 

 이번에 베와 소금 등의 물건을 똑같이 주어서 보내면서, 누차 오가며 수고한 일을 위로하고 타일러 보내는 것이 좋겠다. 

 짐승같은 무리에게 어찌 예의(禮義)를 가지고 책망하겠는가. 잘 대접해 보내도록 하라.”

하였는데, 비변사가 아뢰기를,

“신들은 당초에 예의를 가지고 책망한 것이 아니며, 또한 잘 대접하지 않고자 한 것도 아닙니다. 

 일전에 홍립의 가족들이 보내는 뜻으로 쌀과 소금을 주어 보냈는데, 

 노적(奴賊)이 이것을 가지고 심지어 애양(靉陽)에 간첩을 쓰기까지 하였습니다


→ 강홍립에게 가족들의 명의로 쌀과 소금을 보냈는데, 누르하치가 조선이 후금에 소금을 보냈다며

   명에 일부러 첩자를 보내 소문을 냈다는 기사입니다.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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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마침내 1619년 여진족을 모조리 통일한 누르하치는 

1620년 마침내 소금을 자체 생산하는 수준까지 이르게 됩니다.

명과의 무역이 모두 끊겼고 조선과의 무역도 원활하지 않자 부족한 소금을 자체 생산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지요.



만문노당 1620년 6월 기사中

○ 1620년 6월에 해 뜨는 쪽  바다에 비로소 소금 끓이라 하며 보냈다.


만문노당 1620년 10월 15일 기사中

○ 1620년 10월 15일에 참장 아르부니가 1니루에서 각각 4명씩 뽑아 데리고 동쪽 바다에 소금 끓이러 가서.

1621년 2월 28일에 이르니 나라의 남자의 수를 계산하며 분배하여 주었다.

또 8보의 한족들이 끊인 소금을 저들에게 주고 남자의 수를 헤아리며 나눠줬다.


마침내 1620년 6월, 10월 두차례에 걸쳐 동해에 사람을 보내 소금을 만들어 오게 합니다.

당시 조선의 이민환이 판단한 후금의 니루는 약 360니루였으니 니루당 4명이면 1400명 가량을 

동해에 소금을 만들라 보낸 것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소금을 만들 줄 아는 기술을 가진 8보의 한족들도 포함되었나 봅니다.


여기서!!!!!!! 이런 후금의 소금 생산 정보를 조선 또한 알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조선왕조실록 1620년 8월 19일 기사中

함경 감사의 치계를 받다

노추(奴酋)가 장수를 보내어 조산(造山) 경계에서 소금을 구웠는데, 함경 감사가 치계하여 아뢰었다.〉


조산을 여지도에서 찾아 보았습니다.


바로 조선의 최 동북방 즉 녹둔도 바로 옆 동네네요.

여기 두만강 건너편에서 누르하치가 1400명을 보내 소금을 만들고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게다가 보낸지 8개월 만에 엄청난 소금을 만들어 와서

나라의 백성들에게 모두 나눠줬다는!!!


그걸 또 한쪽에서는 예리한 눈으로 감시하고 있었다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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