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5년경 한양의 호구수와 노비의 수 누르하치 관련 이야기

군사력 증강을 위한 인조대의 호패법 시행 초기의 기록들입니다.

1624년, 1625년 호패법을 시행해야 한다! 말아야 한다!로 조정에서 갑론을박이 계속되었는데요.

인조는 마침내 1625년 7월 20일 호패법 시행을 결정하고 호패법의 시행을 강력히 주장한 최명길을 호패청 당상으로 삼습니다.

하여 호패법이 시행되고 그 조사치가 보고되었는데요.

1625년 11월 10일 조사보고에 따르면 우선 수도 한양의 호구수가 4만여 호, 이중 노비가 2만여 호에 이른다고 되어 있네요.

노비종부법 시행의 건의가 있었으나 인조는 의논은 할 수 있으나 쉽게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고 하고 있습니다.

1626년 6월에는 남정이 226만 명으로 조사되었네요.


한양은 호구수는 호패법 시행 초기라 얼마나 정확한지는 잘 모르겠네요.

이후의 기록에는 한양의 호패가 5만 개 밖에 지급되지 않은 이유에 대해서 논하는 구절도 있고요.

호패법은 1626년 1월 1일자로 시행하기로 결정되었는데, 호패를 차지 않은 사람은 강력하게 처벌한다고 법을 정하였고

한양에서는 1625년 12월 1일부터 거의 모든 남자가 호패를 차고 다닌다는 기록도 있네요.

그러나 실제 법의 집행은 한양의 경우는 1626년 3월1일, 지방은 4월1일로 정했네요.

그러나 호패법은 여러 가지 부작용이 있었고 1627년 5월경에는 혁파 기사도 보이더군요.

백성들 입장에서야 나라에서 호구 조사를 하는 목적이 결코 달갑지만은 않았을 것이기에 말입니다.


조선왕조실록 1625년 11월 10일 기사中

이서가 아뢰기를,
“크게 우려할 만한 것이 또 있습니다. 
 서울의 4만여 호(戶) 가운데 사천(私賤)이 반을 차지하는데, 이렇게 된 데에는 실로 그럴 만한 까닭이 있습니다. 
 이른바 사내종이 양민(良民) 아내에게 장가들어 자식을 낳으면 사내종이라고 하고, 
 계집종이 양민에게 시집가 자식을 낳으면 그 어미의 신분을 따르기 때문에 이렇게 된 것입니다. 
 그렇지만 조종조의 본의(本意)가 어찌 이와 같겠습니까. 
 지금 서얼(庶孼)들이 모두 의관(衣冠)의 반열에 끼어 있어 지금 널리 허통(許通)하자는 의견이 나오고 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지금부터는 양민 남편에게 시집가 낳은 자식은 양인(良人)의 신분으로 
 천인(賤人)의 일을 하는 역자(驛子)의 규례처럼 하면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찍이 듣건대, 선왕조(先王朝)에서 양민이 모두 사천이 되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구분해 주자는 
 논의가 있어 서경(署經)까지 거쳤는데 그 뒤에 행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이 문제는 의당 한번 변통해야 하겠지만 쉽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626년 6월 5일 기사中
호패청이 남정의 총수를 책으로 만들어 보고하다
호패청(號牌廳)이 추가로 기록하여 성책(成冊)한 것을 바쳤는데, 
남정(男丁)의 총수는 1백 23만여 명으로 그 전에 기록한 1백 3만여 명까지 합계 2백 26만여 명이라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625년 12월 16일 기사中
호패청이 호패의 패용을 기찰하는 시기를 늦추도록 건의하다
호패청이 아뢰기를,
호패를 패용하는 기한을 당초 병인년 1월 1일로 정하였으니, 기한이 지난 뒤에도 호패를 차지 않은 자는 사목(事目)에 의거하여 처단해야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듣건대 경외의 무지한 백성들이 사목의 준엄함을 알지 못해 어물어물 그대로 지내기도 하고, 먼 변방의 외진 고을에는 늦게 전파되어 미처 알지 못하기도 하고, 혹 이리저리 옮겨 다니느라 호적을 만들 때에 미치지 못한 자도 매우 많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무리들을 일체 무거운 형벌로 처단한다면 죽는 자가 매우 많고 또 자신(自新)하는 길도 막히게 될까 두렵습니다.
따라서 이미 호적이 작성된 모든 사람은 귀천을 막론하고 한정된 날짜 안에 패용하게 하되, 관진(關津)에서 기찰하는 한 조목만은 우선 조금 늦춰 호패를 패용할 기한을 3월 1일로 개정하고 이 기한이 지난 뒤에는 결단코 용서하지 않는다는 내용으로 각도의 관찰사에게 하유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하민(下民)들이 법령을 믿지 않게 된 지가 이미 오래되었다. 지금 아무런 까닭없이 기한을 물려 정한다면 백성들이 법을 경시하는 것이 지금과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3월로 정한 기한을 백성들이 또 믿지 않는다면 한갓 기한을 넘긴 폐단만 있게 될 뿐, 마침내는 종결될 날이 없게 될 것이다. 현재의 계책으로는 호패를 차게 한 뒤 우선 경중(京中)에서 사목대로 법을 시행하도록 하는 것이 제일이다. 그런 뒤에 다시 백성들에게 개유하여 그 기한을 넉넉히 물려 주어 자수할 길을 열어 주도록 하는 것이 나을 것이다. 그러면 백성들이 반드시 명령을 따르게 되어 호령이 행해질 것이니, 다시 의처(議處)하도록 하라.”
하였다. 복계하기를,
“신들이 삼가 성교를 보건대 그 뜻이 준엄하시니 이대로 봉행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다만 염려되는 것은, 간세(奸細)한 백성들이 국법을 믿지 않고는 ‘이 법이 끝내는 행해지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하면서 늘 우선 피하고 보자는 생각을 품고 있다가 마침내 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나서야 비로소 연달아 추현(追現)해서 패용할 기한이 이미 급박하여 미처 다 기록하지 못하게 될까 하는 점입니다. 따라서 지금 일체 왕법대로 시행한다면 이루 다 처벌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조정에서도 한만하게 하여 기한을 어기게 한 잘못을 면하기 어렵게 될 것입니다. 신들의 생각으로는 기한을 조금 늦추어 그 추현을 허락해 주고 그래도 영을 따르지 않을 경우 비로소 법대로 시행하는 것이 삼령 오신(三令五申)의 뜻에 부합되는 것 같습니다.
이달 1일 이후로 서울에 사는 사람들은 거의 호패를 차고 있으나 그 중에는 이미 입적(入籍)이 되었는데도 일 때문에 멀리 가 있어 미처 낙인(烙印)하지 못한 자도 있고, 외방 사람으로서 호패를 찰 기한 전에 서울에 와서 출사했기 때문에 본적(本籍)에서 호패를 받아야 하는데도 길이 멀어 미처 가져 오지 못한 자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무리들은 고의로 법을 범한 자와는 비할 수 없으니, 갑자기 일체의 법을 가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서울도 이러한데, 하물며 외방은 어떻겠습니까. 미처 패용하지 못한 사람이 분명히 무척 많을 것입니다. 지난번 계사의 내용대로 서울은 3월 1일, 외방은 4월 1일로 다시 추록(追錄)할 기한을 정하여 빠짐없이 모두 패용하게 한 뒤에 일일이 적발하여 법대로 시행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따랐다.


덧글

  • 영악한 사냥꾼 2019/03/06 23:29 #

    세종이 만든 일천즉천제 때문에 노비가 엄청나게 늘었죠. 양반들이 내놓고 노비 늘이려고 자기 노비랑 양민이랑 결혼시키려고 했었고. 이건 심지어 이황도 그짓거리 했었다는....

    호패법은 뭐... 양반들이 반대한 거죠.. 군역의 의무를 양민만이 아니라 양반과 노비에게도 지우겠다는 거니까.. 자기들이 경제적으로 손해가 막심하니까요.. 결국 호패법은 대원군 때 되어서야 제대로 실시가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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