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방어를 하면 뭐 하나? 오랑캐 사다리에 뚫리는데 누르하치 관련 이야기

1621년 3월 당시 요동 심양성은 그야말로 난공불락을 자랑하는 우주방어를 시전하였습니다.

10겹의 구덩이와 1,2차 해자와 울타리 특히 2차 해자는 깊이 6m, 폭이 15m였으며

해자 뒤에는 대포와 포로 중무장하였고 수비 병력은 7만이나 존재하였습니다만



후금군은 그걸 사다리로 뚫어버립니다. 그것도 단 2시간만에 뚫립니다.

장수가 허접하냐 하면 그것도 아닌 것이 당시 심양성의 방어 장수가 하세현이라는 명장이었습니다.


<1621년 심양성의 방어구조>


명 조정에서는 사르후 전투이후 후금과의 대규모 야전을 피하였고 성을 지키는 전략으로 수정합니다.

심양성 전투가 벌어지기 1년 전 조선이 후금에 대량의 소금을 보냈다는 명의 의심을 해명하기 위해

명 북경을 방문한 조선 사신 이정귀(李廷龜)는 요동을 거쳐가면서

당시 명의 요동 방어 구축상황을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하게 됩니다.


경신연행록 中

(1620년) 3월 17일

(중략)

총병 하세현(賀世賢)이 휘하의 군병들을 거느리고 호피역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호피역은 요양이나 심양과의 거리가 모두 60리이다.

경략이 해자(垓字)를 파는 일로 하세현에게 영전(令箭)을 보내 500명의 군정(軍丁)을 뽑아 부역하는 곳으로 보내도록 하자, 하세현이 군정을 보내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저는 적의 보루를 마주하여 진을 치고 있습니다. 지금 마군(馬軍)들로 하여금 말을 버리고 부역에 나아가게 한다면 만약 위급한 상황이 생겼을 때 어떻게 그들을 쓸 수 있겠습니까. 뒤에 만약 재차 이런 명령을 내리시려거든 제 목을 잘라 가십시오. 마군을 보낼 수 없습니다.

하니, 경략이 자못 기뻐하며 그 일을 그만두었다고 한다. 

경략은 성의 방어에 마음을 기울여 직접 군병을 독려하고 날짜를 계산하여 일을 감독하면서 

해자를 크게 팠고 마침내 태자하(太子河)의 물을 끌어왔다. 

벽돌을 구워 담장을 쌓고 성가퀴를 수축하여 낮은 곳을 높게 만드니 군정(軍情)은 매우 고달팠지만 요좌(遼左) 일대가 이 공사에 힘입어 아무런 걱정이 없게 되었으며, 집을 짓고 밭을 갈며 백성들은 안정을 되찾았다.

(중략)

3월 19일. 요동을 떠나 행렬이 삼차하에 이르니 대군(大軍)이 길을 가득 메우고 있어 배다리〔浮橋〕를 설치한다 하더라도 건널 수가 없었다. 강변에 늘어선 병사와 말들, 화차와 군량미를 실은 수레가 몇 리에 걸쳐 이어져 있었다. 우리 일행 역시 강변에 유숙하며 어떤 상황인지를 물어보았더니, 경략이 변방에 노적이 나타났다는 보고를 받고서 광녕에 주둔하던 장관(將官)을 징발하였고 또한 길에 있는 군마를 재촉하였기 때문에 이처럼 요동으로 가는 사람이 이어져 있다고 하였다.

다음 날 3000의 병마를 거느리고 온 광녕의 총병 이광영(李光榮)을 만나게 되었기에, 통관(通官)을 보내 총병의 가마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사은하는 표문을 받들고 들어가게 된 이유를 아뢰고 또한 서쪽 변방에 노적의 경보가 있으므로 우리가 가는 길에서 호송해 줄 군마를 조발해 줄 것을 요청하게 하였다. 총병이 즉시 야불수(夜不收)를 차출해 영전(令箭)을 주며 우리를 수행하도록 하였고, 그로 하여금 군마를 조발하여 산해관(山海關)까지 호송하도록 하였다. 총병이 자리를 떠난 뒤에 표하(標下)의 장관에게 물었더니, 경략이 동쪽 변방의 적보가 매우 긴급하다고 생각하여 총병으로 하여금 병사를 거느리고 동창보(東昌堡)에 진주하면서 삼차하의 뱃길로 오는 노적을 방어하게 했다고 하였다. 이른바 동창보가 바로 우가장(牛家莊)이니 삼차하에서 20리쯤 되는 곳에 있다. 중조(中朝) 초병(哨兵)의 보고와 우리나라에서 보고한 내용에 모두 ‘노적과 재새가 함께 모의하여 길을 나누어 삼차하를 치려 한다.’라는 말이 있었기 때문에 이처럼 방수하는 것이었다. 얼마 뒤 섬서(陝西)의 병사 2000명, 감주(甘州)의 병사 3800명, 하남(河南)의 병사 1500명을 만났는데, 끝없이 길을 메우고 차례차례 요동을 구원하러 간다고 하였다.



조선왕조실록 1621년 2월 11일 기사中
회계하기를,
“불행히도 우리 나라는 이 적들과 국경이 서로 접하고 〈가로막아주는 바다가 없어서〉 오랑캐의 기병이 치달려 오면 며칠 내로 당도할 수가 있습니다. 〈이 적들이 움직이지 않으면 그만이지만 만약 한 번 움직이게 되면 전투와 수비면에서 모두 믿을 수가 없습니다.〉 신들이 밤낮으로 애를 태우며 근심하지만 좋은 계책이 없습니다. 〈가만히 들으니〉 요동과 심양 사이에 주병(主兵)과 객병(客兵)이 28만 명이나 되는데도 오히려 근심한다고 하니 하물며 우리 나라의 병력으로 당해낼 수 있겠습니까. 지혜있는 사람의 말을 들어보지 않더라도 이미 방어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조선왕조실록 1621년 3월 28일 기사中
의주 부윤 정준(鄭遵)이 치계하기를,
“이달 13일에 노적(奴賊)이 대단한 형세로 심양(瀋陽)을 공격하여 함락시켰고, 
(중략)
세현은 번장(蕃將)으로 날래고 웅걸하여 전투를 잘하였다. 전날 묵산(墨山)의 전투에서 크게 전승하여 중국이 그를 중하게 의지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죽으니, 국경의 기세가 꺾이게 되었다.
 


후금의 공성병기는 사다리와 방패차가 다였습니다.
해자의 물은 방패 수레차를 이용해 물을 제거한 이후 공성전에 돌입하네요.

만주실록 1621년 3월 10일 기사中
ilan biyai juwan de taidzu genggieyn han.
일안 뱌이 주완 더 타이주 겅옌 한.
3 월의 10 에 태조 겅옌 한.
beise ambasa geren cooha be gaifi daiming gurun be dailame
버이서 암바사 거런 초오하 버 가이피 다이밍 구룬 버 다일아머.
버이러들 암반들 여러 군대 를 가지고 대명 국 을 정벌하며
wan kalka coohai ing ni tehereme hashalara den hashan be
완 칼카 초오하이 잉 니 터허러머 하스할아라 던 하스한 버
사다리 방패 군대의 영 의 알맞게 울타리칠 높은 울타리 를
gemu weihu de tebufi hunehe bire be wasime.
거무 워이후 더 터부피 후너허 비라 를 와시머.
모두 통나무배 에 싣고서 혼하 강 을 내려가며.
muke olhon i xen yang hecen be gaime amba cooha juraka.
무커 올혼 이 션 양 허천 버 가이머 암바 초오하 주라카.
물 육지 로 심 양 성 을 취하며 큰 군대 출발했다.

만문노당 1621년 3월 13일 기사中
○ (1621년 3월) 13일 토끼때(05~07시)에 면갑병이 수레와 방패 가져가서
성의 동쪽을 공격하며 가니 사람 몸처럼 깊숙이 10겹 구덩이 파 있었다.
구덩이의 바닥에 나무의 꼬챙이 끼워 있었다.
구덩이의 안쪽에 1 갑탄의 끝에 1 층 해자 파 있었다.
그 해자의 안쪽 가장자리에 10~20 사람 들어 올린 약간 큰 나무의 울타리 세워져 있었다.
울타리의 속 넓이 10발(약15m), 깊이 4발(약6m)의 2차 큰 해자 파 있었다.
해자의 바닥에 나무 꼬챙이 끼워 있었다.
안쪽 해자의 안쪽 가장자리의 수레와 방패 정렬하고
1 수레에 큰 포 각2, 작은 포 각4 설치하여 있었다.
2 수레의 사이에 거리 1발(약1.5m), 높이 배꼽까지 둑 쌓아 올리고
그 1발 둑의 중간을 깎고 각5 포 설치하여 있었다.
그와 같이 견고히 한 성을 공격하며 용때(07~09시)에 (성 앞에) 이르러서 용때(07~09시)에 곧바로 싸우며 취했다.
7만 군대를 모두 죽였다.

구구요동성기(舊舊遼東城記) 中 심양과 요양성 전투관련

아침이 되자 태조는 패륵(貝勒)의 좌익 4기의 군사를 거느리고 성 서쪽 갑문(閘門)을 파서 호(濠)의 물을 빼고, 또 우익(右翼) 4기의 군사를 시켜 성 동쪽 물이 들어오는 입구를 막게 하였으며, 몸소 우익을 인솔하여 순차(楯車)를 성 가에 담장같이 진열하여 흙을 담아 나르고 돌을 운반하여 물을 막았다.

(중략)

청 나라 사람들이 용기를 내어 돌격해 들어가 사다리를 세워 성으로 올라가 

드디어 성의 서쪽 한 면을 빼앗고 민중을 구축(驅逐)하며 칼로 베니 성안이 어지러웠다.


조선왕조실록 1625년 11월 10일 기사中

이서가 아뢰기를,

“중원은 군령(軍令)이 매우 엄하여 적이 쳐들어왔는데 성이나 지키면서 교전하지 않으면 그런 장수에게는 죄를 주기 때문에 싸우지 않을 수 없다고 합니다. 지난번 심양(瀋陽) 전투 때 어떤 훌륭한 장수 하나가 있는 힘을 다해 격전을 벌였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 사람은 필시 하세현(賀世賢)일 것이다.”

하니, 이서가 아뢰기를,

“그들과는 야전(野戰)을 벌여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이 적(賊)은 야전을 벌일 때에 철기(鐵騎)로 선봉을 몰아나가고 부월(斧鉞)로 후미를 독려하여 그 예봉을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그 전법은 진격이 있을 뿐 후퇴라고는 없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서쪽을 침범할 계획은 없다고 하던가?”

하니, 이서가 아뢰기를,

노추의 행군(行軍)은 일정한 방향이 없습니다. 만약 공격할 뜻이 있으면 노추는 먼저 산 위에 자리잡고 여덟 장수를 불러 일을 논의한 다음 취각(吹角)하고 행군하는데, 그런 뒤라야 그 군대가 비로소 가는 방향을 알게 된다고 합니다.”


-야전도 안되고, 공성도 안되고 요동 방어 난감하네요-


덧글

  • 영악한 사냥꾼 2019/03/11 21:20 #

    하세현을 유인해서 야전으로 끌어들여 일단 그와 지휘부를 상당히 제거하고,

    이미 침투해 있던 몽골 기병 및 상인으로 위장한 병사들이 내부에서 문을 열었다고 하더군요.

    심양, 요양은 워낙 단단한 거성이라 닥돌로는 힘들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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