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사 간신열전(7) 진회(秦檜) 열전 국역 1부-할지는 절대 아니되옵니다! 송사 번역

안녕하세요. 길공구입니다.

몇몇 인물들에 대한 열전을 번역하고 있는데요.

오늘은 남송의 간신 진회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1편 송사 간신열전 채경 http://cafe.naver.com/booheong/98808

2편 송사 간신열전 곽약사 http://cafe.naver.com/booheong/103206

3편 송사 환자열전 동관 [방랍 포함] http://cafe.naver.com/booheong/85702

4편 송사 간신열전 장방창(張邦昌) http://cafe.naver.com/booheong/140479

5편 송사 간신열전 황잠선(黃潛善) http://cafe.naver.com/booheong/141227

6편 송사 반신열전 묘부/유정언 http://cafe.naver.com/booheong/152079


송사

한세충이치, 양재흥, 동관[방랍], 채경, 부언경, 곽약사, 반미, 이사사고구송강장방창, 황잠선묘부(유정언)


금사


명사

두송 이성량


청사고

왕올당, 왕고, 대선/다이샨, 태조 누르하치, 저영/추옝, 서이합제/슈르하치, 아이합제/야르하치 

피옹돈[비영동], 호호리[하화례], 어이두[액역도], 안퍙워[안비양고]훠르한/호이한부찰씨(푸차 군다이) 

영아이대/용골대/잉월다이액이덕니/어르더니 밬시


송서

원문 출처 : https://zh.wikisource.org/wiki/%E5%AE%8B%E5%8F%B2/%E5%8D%B7473



사전 보고 번역하는 것이라, 오역이 많습니다.

수정할 부분 알려 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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秦檜,字會之,江寧人。

登政和五年第,補密州教授。

繼中詞學兼茂科,歷太學學正。

靖康元年,金兵攻汴京,遣使求三鎮,檜上兵機四事:

一言金人要請無厭,乞止許燕山一路;

二言金人狙詐,守禦不可緩;

三乞集百官詳議,擇其當者載之誓書;

四乞館金使於外,不可令入門及引上殿。

不報。

除職方員外郎。

尋屬張邦昌為幹當公事,檜言:

「是行專為割地,與臣初議矛盾,失臣本心。」

三上章辭,許之。

時議割三鎮以弭兵,命檜借禮部侍郎與程瑀為割地使,奉肅王以往。

金師退,檜、瑀至燕而還。

御史中丞李回、翰林承旨吳幵共薦檜,拜殿中侍御史,遷左司諫。

王雲、李若水見金二酋歸,言金堅欲得地,不然,進兵取汴京。

十一月,集百官議於延和殿,范宗尹等七十人請與之,檜等三十六人持不可。

未幾,除御史中丞。

진회(秦檜)는, 자(字)는 회지(會之)이고, 강녕인(江寧人)이다.

정화(政和/북송 8대 황제 휘종의 #4연호) 5년(1115년)에 등제(登第/과거 급제)하였고, 

밀주(密州) 교수(教授)를 보(補/임명함)하였다.

이어 사학겸무과(詞學兼茂科/1110년 설치된 3학 중 하나)에 있었고, 태학(太學) 학정(學正)을 역임(歷)하였다.

정강(靖康/북송 9대 황제 흠종의 #1연호) 원년(1126년)에, 금병(金兵)이 변경(汴京/개봉)을 공격(攻)하였는데,

견사(遣使/사신을 보냄)하여 삼진(三鎮)을 구(求)하니, 진회(檜)가 병기사사(兵機四事/군사적 전략 4가지)를 올렸다.

일언(一言)은 금인(金人)의 요청(要請)이 무염(無厭/만족할 줄 모름)하니, 

바라건대 연산(燕山) 일로(一路)을 허락(許)하는데 그쳐야 한다.

이언(二言)은 금인(金人)이 저사(狙詐/교활하게 속임)하니, 

수어(守禦/외적의 침입을 막음)가 완(緩/늦춤)함이 불가(不可)하다.

삼(三)은 바라건대 백관(百官)의 상의(詳議)를 집(集/모음)하여, 

그 당(當/주관함)하는 자(者)를 택(擇)하여 서서(誓書/서약서)를 가져가게 하여야 한다.

사(四)는 바라건대 금사(金使/금의 사신)를 밖에 관(館/묵음)할 것이며,

입문(入門/성문으로 들어옴)하게 하거나 더불어 상전(上殿/입궐함)을 이끄는 것은 불가(不可)하다 하였다.

불보(不報/상소에 대한 답을 내리지 않음)하였다.

직방원(職方員) 외랑(外郎)을 제수(除)하였다.

잇달아 장방창(張邦昌)을 속(屬/수행함)하는 간당공사(幹當公事)로 삼았는데, 진회(檜)가 말하길

「이는 오직 할지(割地/영토를 할양함)를 행(行)하고자 함이고,

  신(臣)과 함께 초의(初議/처음 의논)와 모순(矛盾/창과 방패)하니,

  신(臣)의 본심(本心)을 잃은 것이나이다.」

세 번 상장(上章/임금에게 글을 올림)하여 사양(辭)하니, 허락(許)하였다.

이때 미병(弭兵/전쟁을 멈춤)으로써 삼진(三鎮)의 할양(割)을 의논(議)하였는데,

명(命)하여 진회(檜)를 예부시랑(禮部侍郎)으로 차(借/꾸밈)하여 정우(程瑀)와 함께 할지사(割地使)로 삼았고,

숙왕(肅王/휘종의 5남 조추趙樞)을 봉(奉/받듦)하여 이로써 가게 하였다.

금사(金師/금나라 군)이 퇴각(退)하였고, 진회(檜)와 정우(瑀)는 연(燕)에 이르렀다가 귀환(還)하였다.

어사중승(御史中丞) 이회(李回)와 한림승지(翰林承旨) 오견(吳幵)이 같이 진회(檜)를 천거(薦)하니,

전중시어사(殿中侍御史)를 배(拜/벼슬을 줌)하였고, 좌사간(左司諫)으로 천(遷/관직을 옮김)하였다.

왕운(王雲)과 이약수(李若水)가 금(金) 이추(二酋/종한과 종망)를 보고는 돌아왔는데,

말하길 금(金)이 굳게 득지(得地/땅을 얻음)하고자 하며,

그렇지 않으면, 진병(進兵/진군)하여 변경(汴京/개봉)을 취(取)하겠다고 하였다.

11월에, 백관(百官)이 모여 연화전(延和殿)에서 의논(議)하였는데, 

범종윤(范宗尹) 등(等) 70인이 주는 것을 청(請)하였고, 진회(檜) 등(等) 36인은 불가(不可)를 유지(持)하였다.

오래지 않아, 어사중승(御史中丞)을 제수(除)하였다.



진회는 자는 회지이고 강녕인이다.

1115년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밀주 교수에 임명되었다.

이어 사학겸무과(1110년 설치된 3학 중 하나)에 있었고 태학 학정을 역임하였다.

1126년에 금나라 군사가 변경(개봉)을 공격하였는데 사신을 보내 3진을 요구하니 진회가 군사적 전략 4가지를 올렸다.

첫 번째는 금인의 요청이 만족할 줄 모르니 바라건대 연산 지방을 허락하는데 그쳐야 한다.

두 번째는 금인은 교활하게 속이니 방비를 늦추는 것은 불가하다.

세 번째는 바라건대 백관의 의견을 모으고 그 주관하는 자를 택하여 서약서를 가져가게 하여야 한다.

네 번째는 바라건대 금의 사신을 성밖에 묵게 할 것이며 도성으로 들이거나 입궐하는 것은 불가하다 하였다.

흠종은 상소에 대해서 답을 내리지 않았고 직방원 외랑을 제수하였다.

잇달아 장방창을 수행하는 간당공사로 삼았는데 진회가 말하길

   <이는 오직 할지(영토를 할양함)를 행하고자 하는 바이고

    신이 주장한 처음 주장과는 모순되오니 이는 신의 본심을 잃는 것이나이다>

세 번이나 상소를 올려 사양하니 허락하였다.

이때 전쟁을 멈추기 위해 3진의 할양을 의논하였는데

명하여 진회를 예부시랑으로 꾸며 정우와 함께 할지를 담당하는 사신으로 삼았고 

숙왕 조추를 받들어 금나라 군영으로 가게 하였다.

금나라 군이 퇴각하자 진회와 정우는 연에 이르렀다가 돌아왔다.

어사중승 이회와 한림승지 오견이 함께 진회를 천거하니

전중시어사에 임명하였고 좌사간으로 관직을 옮겼다.

왕운과 이약수가 금의 2추장 종한과 종망을 보고 돌아왔는데 말하길 

금나라가 굳게 땅을 얻고자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진군하여 변경(개봉)을 취하겠다고 하였다.

1126년 11월에 백관이 모여 연화전에서 의논하였는데 

범종윤 등 70여인은 땅을 주는 것을 청하였고, 진회 등 36인은 불가론을 유지하였다.

오래지 않아 어사중승을 제수하였다.


<간신의 대명사가 된 진회>


<현재까지도 중국인들에게 미움받고 있는 진회>



<진회의 서체>



개봉 1차 포위전

1126년1월 금군 1차 [개봉포위병력]과 [송근왕병]의 규모
송나라 병사 2천 vs 여진 기병 17기 그 처절한 패배

개봉 2차 포위전

1126년 금의 2차 침공 진격로 연구와 북송의 멸망

절가존(折可存) 관련 기록 및 금에서 요구한 대신 및 인질 등 명단

육갑도사 곽경, 북두신병 관련 속자치통감 번역
송사 흠종 국역 12부 1126년 11월-망국의 기운, 육갑병[2차 개봉 포위전]
 


요약.

진회는 강녕 사람으로 1115년 26세의 나이로 과거에 급제하여 조정에 출사한다.

1126년 초 금은 6만 병력으로 개봉을 1차 포위한다.

이때 금은 3진 할양을 요구하였는데 진회는 3진 할양의 불가를 주장하고

이전에 금나라로부터 양도받은 연산(연경/현 북경)만을 돌려주자고 주장한다.

1126년 말 금의 12만 병력이 개봉을 2차 포위하였을 당시

조정 백관의 2/3은 할지를 찬성하였으나 진회는 앞장서서 할지를 반대하였다.

훗날 남송의 재상으로서 군벌을 숙청하고 금에 땅을 할양하고 화의에 적극 찬성한 진회의

젊은 시절은 다분히 의기와 혈기가 넘치는 젊은 선비였다.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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