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당시 요동으로 진군한 명군 7만(조선아 버텨줘!) 병자호란 이야기

병자호란 직전 명나라 북경에 사신으로 갔던 김육(金堉)의 조경일록(朝京日錄)에 의하면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명나라 군은 그 틈을 이용하여 요동을 공격하고자 하였더군요.

실행자는 금주(錦州)에 있던 조대수(祖大壽)인데, 

후금 시절에도 후금군의 공격을 받아 거짓 항복을 할 정도로 수세적인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던 그가 청의 본군이 조선으로 갔다는 말을 듣고 호기라 여겨

산해관 밖의 모든 병력을 긁어모아 요동을 치겠다는 계획을 했다고 합니다.

1637년 2월 20일 6~7만의 철기병을 이끌고 삼차하를 건넜다가 

청나라군이 보이질 않고 제장들의 의견이 일치되지 않자

회군하여 3월 10일에 본진으로 되돌아왔다고 합니다.-0-;;;



조경일록(朝京日錄) 1637년 윤4월18일 기사中

비가 옴. 고 태감이 도로 관상(關上)으로 갔다. 이곳에 와서 들으니, 

“2월 20일쯤에 태감과 군문이 조 총병(祖摠兵)과 함께 관외(關外)의 철기(鐵騎) 6, 7만 명을 거느리고 

삼차하(三叉河)를 건너갔다가, 오랑캐의 군사들이 보이지 않자 퇴각하여 3월 10일쯤에 진(鎭)으로 되돌아왔다.” 하였다. 

이는 대개 조대수(祖大壽)의 아들이 포로가 되어 적중(賊中)에 있으면서 그의 아버지에게 몰래

 ‘오랑캐의 군사들이 동쪽으로 쳐들어갔으니 지금이 바로 빈틈을 타서 들이치기에 좋은 때이다.’

라고 통보하였으므로, 조 총병이 단단히 마음먹고 군사를 진격시켰으나, 

여러 장수들이 모두 겁을 내어 논의가 일치되지 않은 탓에 마침내 돌아온 것이라고 하였다.

점심때 모인이 와서 보면서 말하기를, 
“무대(撫臺)가 이미 용무영(龍武營)의 천총(千摠) 장성공(張成功)에게 맡겨서 병선 4척을 거느리고 호송하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무대는 군문(軍門)을 이른다. 부 참장(傅參將)에게서 소식이 전혀 없는데, 
내가 22일에 배를 타겠다고 일찍이 군문을 만나 보았을 때 말하였으므로, 이곳에서 장관(將官)을 차정해서 보낸 것이다.



 


<김육이 병자호란 발발 소식을 듣고 지은 시>
때는 숭정 9년
사신으로 북경에 조회하러 가서
그믐밤 연경 숙소에 묵고 있을 때
병석에 누워 오랑캐 소식 듣고는
눈 가득 우극의 눈물 흘리면서
놀란 마음으로 귀국을 하였다네.

*당시 청의 본거지를 지키던 왕은 청나라 서열 No3 지르갈앙, NO8 아지거, NO10 아바타이 3명 밖에 없었음.

*조대수 관련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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