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금 돌격대장 양고리 열전 국역 5부-몽고를 거쳐 북경을 공략하다! 청사고 번역

안녕하세요. 길공구입니다.

몇몇 인물들에 대한 열전을 번역하고 있는데요.

오늘은 병자호란 당시 조선에서 전사한 최고위급 장수인 양고리, 만주어로는 양우리[yangguri]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1부-14세에 원수의 귀와 코를 씹어먹다! http://cafe.naver.com/booheong/158920

2부-300으로 적 1만을 상대하다! http://cafe.naver.com/booheong/158922

3부-사르후 전투의 1등 공신! http://cafe.naver.com/booheong/158925

4부-누르하치<전장에선 몸 좀 사리도록 하라!> http://cafe.naver.com/booheong/158927



청사고

왕올당, 왕고, 대선/다이샨, 태조 누르하치, 저영/추옝, 서이합제/슈르하치, 아이합제/야르하치 

피옹돈[비영동], 호호리[하화례], 어이두[액역도], 안퍙워[안비양고]훠르한/호이한부찰씨(푸차 군다이) 

영아이대/용골대/잉월다이액이덕니/어르더니 밬시



한세충이치, 양재흥, 동관[방랍], 채경, 부언경, 곽약사, 반미, 이사사고구송강장방창, 황잠선묘부(유정언)진회


금사


송서

 

원문 출처 : https://zh.wikisource.org/wiki/%E6%B8%85%E5%8F%B2%E7%A8%BF/%E5%8D%B7226



사전 보고 번역하는 것이라, 오역이 많습니다.

수정할 부분 알려 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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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年,揚古利守耀州,明將毛文龍遣兵三百來攻,略城南蕎麥衝,揚古利率兵追擊,盡殲之。
旋進三等公。
天聰三年九月,同阿山等捕逃人,至雅爾古,遇文龍所部越塞採葠者,擊殺九十六人,獲千總三及其從者十六人以還。
十月,從伐明,薄明都,擊敗滿桂兵於城北,砲兵陷敵伏中,揚古利率親軍十餘人奪圍入,悉出之。
軍還,從貝勒阿巴泰等略通州,焚舟千餘。
攻薊州,明軍來援,太宗督右翼三旗攻其西,貝勒代善等督左翼四旗攻其東,
右翼兩紅旗兵少卻,揚古利率正黃旗兵直前突陣,敵敗走。
太宗命兩紅旗將佐納鍰自贖,以賜揚古利,揚古利分畀將士,不自私。
六年,太宗伐察哈爾,命貝勒阿巴泰等及揚古利居守,明兵來侵,諸貝勒禦之。
錦州戰,明兵銳甚,六旗俱卻,揚古利大怒,獨率本旗兵奮擊破之。
旋復從太宗入明邊,攻大同、宣府,與貝勒阿巴泰等拔靈丘,隳王家莊,取之。
[천명(天命/후금 1대 한 누르하치의 #1연호)] 10년(1625년)에, 
양고리(揚古利)가 요주(耀州)를 수비(守)하였는데, 
명(明)의 장수(將) 모문룡(毛文龍)이 병(兵) 300을 보내 내공(來攻/공격하여 옴)하여,
성(城) 남쪽(南) 교맥(蕎麥/메밀과 보리)의 요충지(衝)를 약탈(略)하니,
양고리(揚古利)가 솔병(率兵/병을 인솔함)하여 추격(追擊)하여, 진섬(盡殲/모두 죽임)하였다.
조금 후에 삼등공(三等公)으로 진급(進)하였다.
천총(天聰/후금 2대 한 홍 타이지의 #1연호) 3년(1629년) 9월에,
동아산(同阿山) 등(等)의 도인(逃人/도망자)을 체포(捕)하여, 아이고(雅爾古)에 이르렀는데,
모문룡(文龍)의 소부(所部/소속 부대)로 월새(越塞/변경을 넘음)하고 채삼(採葠/인삼을 채취함)하는 자와 조우(遇)하니,
96인을 격살(擊殺/공격하여 죽임)하였고, 
천총(千總) 세 명과 더불어 그 종자(從者) 16인을 획(獲/얻음)하고는 이로써 귀환(還)하였다.
10월에, 종군(從)하여 명(明)을 정벌(伐)하였는데, 명도(明都/북경, 베이징)를 육박(薄)하였고,
만계(滿桂)의 병(兵)을 성(城)의 북쪽(北)에서 격패(擊敗/공격하여 깨트림)하였고,
포병(砲兵)이 적(敵)의 매복(伏) 중(中)으로 함(陷/빠짐)하자,
양고리(揚古利)가 친군(親軍) 10여인을 인솔(率)하여 위입(圍入/포위속으로 들어감)하여 탈(奪/빼앗음)하였고,
모두 탈출(出)하였다.
군환(軍還/회군)하였고, 패륵(貝勒) 아파태(阿巴泰) 등(等)을 따라 통주(通州)를 약탈(略)하였고,
주(舟/배) 천여 척을 분(焚/불사름)하였다.
계주(薊州)를 공격(攻)하였는데, 명군(明軍)이 내원(來援/구원하여 옴)하자,
태종(太宗/후금 2대 한 홍 타이지)이 우익(右翼) 3기(旗)를 감독(督)하여 그 서쪽(西)을 공격(攻)하였고,
패륵(貝勒) 대선(代善/다이샨) 등(等)이 좌익(左翼) 4기(旗)를 감독(督)하여 그 동쪽(東)을 공격(攻)하였는데,
우익(右翼) 양홍기(兩紅旗)의 병(兵)이 소각(少卻/조금 물러남)하자,
양고리(揚古利)가 정황기(正黃旗)의 병(兵)을 인솔(率)하여 곧바로 앞으로 돌진(突陣)하니,
적(敵)이 패주(敗走/패하여 도주함)하였다.
태종(太宗)이 명(命)하여 양홍기(兩紅旗)의 장좌(將佐/장군과 보좌관)는 납환(納鍰/돈을 거둠)하여 
자속(自贖/몸소 돈을 내어 속죄함)하게 하였고,
이로써 양고리(揚古利)를 포상(賜)하니, 양고리(揚古利)가 분(分/나눔)하여 장사(將士)에게 비(畀/줌)하였고,
자기 사적으로는 취하지 않았다.
[천총(天聰/후금 2대 한 홍 타이지의 #1연호)] 6년(1632년)에, 
태종(太宗)이 찰할이(察哈爾)를 정벌(伐)하였는데, 
명(命)하여 패륵(貝勒) 아파태(阿巴泰) 등(等)과 더불어 양고리(揚古利)로 하여금 거수(居守/본거지를 지킴)하게 하였고,
명병(明兵)이 내침(來侵/침략하여 옴)하자, 여러 패륵(貝勒)이 방어(禦)하였다.
금주(錦州)의 전투(戰)에서, 명병(明兵)의 예기(銳)가 심(甚)하였는데, 6기(旗)가 구각俱卻/모두 물러남)하자,
양고리(揚古利)가 대노(大怒)하여, 홀로 본기(本旗)의 병(兵)을 인솔(率)하여 분격(奮擊/분발하여 공격함)하여 격파(破)하였다.
개선(旋)하여 다시 태종(太宗)을 따라 명(明)의 변경(邊)으로 들어가, 대통(大同)과 선부(宣府)를 공격(攻)하였는데,
패륵(貝勒) 아파태(阿巴泰) 등(等)과 함께 영구(靈丘)를 발(拔/쳐서 빼앗음)하였고,
왕가장(王家莊)을 휴(隳/무너뜨림)하고는, 취(取)하였다.



1625년에 양고리가 요주를 수비하였는데 명나라 장수 모문룡이 병력 300을 보내 공격하여 와서 
성 남쪽 메밀과 보리밭을 약탈하니 양고리가 병력을 인솔하고 추격하여 모두 죽였다.
조금 후에 삼등공으로 진급하였다.
1629년 9월에 동아산 등의 도망자를 체포하여 아이고에 이르렀는데 
모문룡의 소속 부대로 변경을 넘어 인삼을 채취하는 자들과 조우하니
공격하여 96인을 죽이고 천총 세 명과 더불어 그 종자 16명을 사로잡고는 돌아왔다.
1629년 10월에 종군하여 명을 정벌하였는데 명의 도성(북경, 베이징)을 육박하였고 만계의 병을 성 북쪽에서 깨트렸다.
포병이 적의 매복 가운데 빠지자 양고리가 친위군 10여 명을 인솔하여 포위속으로 들어가 빼앗아 모두 탈출하였다.
회군하여 패륵 아파태 등을 따라 통주를 약탈하였고 배 천여 척을 불살랐다.
계주를 공격하였는데 명군이 구원하여 오자 태종이 우익 3기를 감독하여 그 서쪽을 공격하였고
패륵 대선 등이 좌익 4기를 감독하여 그 동쪽을 공격하였는데
우익 양홍기의 병력이 조금 물러나자 양고리가 정황기의 병력을 인솔하여 곧바로 앞으로 돌진하여
적이 패하여 도주하였다.
태종이 명하여 양홍기의 장군과 부장은 돈을 거둬 속바치게 하였고
이를 양고리에게 포상하니 양고리가 모두 나눠 장졸들에게 주었고 사적으로는 전혀 취하지 않았다.
1632년에 태종이 찰합이(차하르)를 정벌하였는데 명하여 패륵 아파태 등과 더불어 양고리로 하여금 본거지를 지키게 하였고
명나라 군이 침략하여 오자 여러 패륵과 함께 방어하였다.
금주의 전투에서 명나라 군의 예기가 심하여 6기가 모두 물러나자
양고리가 대노하여 홀로 본기의 병력을 인솔하여 분격하여 격파하였다.
개선하여 다시 태종을 따라 명의 변경으로 들어가 대통과 선부를 공격하였는데
패륵 아파태 등과 함께 영구를 쳐서 빼앗았고 왕가장을 무너뜨리고는 취하였다.


요약.

1625년 양우리는 요주를 수비하고 있었는데 가도 모문룡의 병사가 약탈하자 추격하여 모두 죽였다.

1629년 홍 타이지는 영원성과 산해관을 우회하여 몽고 코르친을 향도로 삼아

영평 용정관, 준화 대안구/희봉구를 거쳐 명 내지로 침입하여 명의 수도 북경을 노린다.

영원성의 원숭환은 참장 조솔교에게 4천, 자신은 9천을 이끌고 북경을 구원하기 위해 남하한다.

원숭환의 부대는 급격한 행군 끝에 북경에 도착해 광거문에서 후금군을 거세게 몰아붙였다.

팔기군의 많은 장수가 명군의 공격에 뒤로 물러났는데

이때 양우리는 후금 돌격대장답게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돌격하여 명군을 격파하였다.

홍 타이지는 후퇴한 팔기군 대장들에게 벌금을 물리고 이를 양우리에게 하사한다.

양우리는 이 재물을 모두 장졸들에게 분배하였다.

원숭환의 부대에 막혀 북경 공략에 실패한 홍 타이지는 명 조정과 화친 협상을 하는 동시에

황도 부근의 도시를 닥치는 대로 약탈한다.

이때 양우리는 통주를 약탈하고 그곳에 정박 중인 배 1천척을 모조리 불사른다.

후금군을 격퇴한 원숭환은 황제의 의심 속에 북경에도 들어가지 못한다.

홍 타이지는 이를 정확히 간파하고 반간계를 획책했다.

결국 원숭환은 북경 공략전 이후 후금과 내통했다는 의심 속에 소환되어 처형당한다.

1632년 홍 타이지의 차하르 링단칸 정벌전에는 본국 수비를 맡았다.

이때 명군이 요동으로 침공해 왔는데 이를 격퇴하였다.

양우리는 계속되는 명나라와의 전투에서 계속 선봉에 섰다.


-6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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