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금 돌격대장 양고리 열전 국역 6부-명은 매년 공격하고 조선은 놔둡시다! 청사고 번역

안녕하세요. 길공구입니다.

몇몇 인물들에 대한 열전을 번역하고 있는데요.

오늘은 병자호란 당시 조선에서 전사한 최고위급 장수인 양고리, 만주어로는 양우리[yangguri]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1부-14세에 원수의 귀와 코를 씹어먹다! http://cafe.naver.com/booheong/158920

2부-300으로 적 1만을 상대하다! http://cafe.naver.com/booheong/158922

3부-사르후 전투의 1등 공신! http://cafe.naver.com/booheong/158925

4부-누르하치<전장에선 몸 좀 사리도록 하라!> http://cafe.naver.com/booheong/158927

5부-몽고를 거쳐 북경을 공략하다! http://cafe.naver.com/booheong/158957



청사고

왕올당, 왕고, 대선/다이샨, 태조 누르하치, 저영/추옝, 서이합제/슈르하치, 아이합제/야르하치 

피옹돈[비영동], 호호리[하화례], 어이두[액역도], 안퍙워[안비양고]훠르한/호이한부찰씨(푸차 군다이) 

영아이대/용골대/잉월다이액이덕니/어르더니 밬시



한세충이치, 양재흥, 동관[방랍], 채경, 부언경, 곽약사, 반미, 이사사고구송강장방창, 황잠선묘부(유정언)진회


금사


송서

 

원문 출처 : https://zh.wikisource.org/wiki/%E6%B8%85%E5%8F%B2%E7%A8%BF/%E5%8D%B7226



사전 보고 번역하는 것이라, 오역이 많습니다.

수정할 부분 알려 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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七年六月,太宗諮諸將兵事,揚古利言:
「用兵不可曠隔,若踰年不用,敵以其時乘間修備,慮誤我再舉。
   我暇,一年再征;不暇,亦一年一征:乃為善策。
   我今當深入敵境克城堡,貝勒諸將已痘者駐守,未痘者從上還都。
   不克,則縱兵焚其村聚;民降者編伍,拒者俘以還。
   各旗獻俘,視牛彔為多寡,兵士所獲聽自取。
   若此,則人人貪得,不待驅迫,爭出私財買馬,兵氣益揚矣。
   戍邊,貝勒許番代,他將卒不許番代。
   不耐勞苦,豈有能拓地成功業者乎?
   或謂用兵數,且妨農。
   婦子相隨,且行且穫,何妨農之有?
   朝鮮、察哈爾宜且置之,山海關外寧遠、錦州亦當緩圖,但深入腹地。
   腹地既得,朝鮮、察哈爾自來附矣。」
時諸大臣所見亦略同,太宗遂定策伐明。
八年五月,復錄揚古利前後戰功,進超品公,位亞貝勒,帽頂嵌珠。
[천총(天聰/후금 2대 한 홍 타이지의 #1연호)] 7년(1633년)에,
태종(太宗)이 제장(諸將)의 병사(兵事/군사에 관한 일)을 자문(諮)하니, 양고리(揚古利)가 말하길
「용병(用兵)은 광격(曠隔/소홀히하고 등한시함)이 불가(不可)하니, 
   만약(若) 유년(踰年/해를 넘김)하여 불용(不用/사용하지 않음)하면,
   적(敵)이 그때를 승간(乘間/잠시 틈을 탐)함으로써 수비(修備/정리하고 준비함)하면,
   우리의 재거(再舉/다시 일으킴)를 오(誤/그르침)할까 여(慮/걱정함)하나이다.
   우리가 가(暇/한가함)하면, 1년(年)에 재정(再征/두 번 정벌함)하고,
   불가(不暇/한가하지 않음)하면, 역시(亦) 1년(年)에 한 번 정벌(征)하면,
   곧 선책(善策/좋은 방책)으로 삼습니다.
   우리가 지금(今) 마당히(當) 적(敵)의 경계(境)에 심입(深入/깊게 들어감)하여 성보(堡)를 극(克/함락함)한다면,
   패륵(貝勒)과 제장(諸將)으로 이미(已) 두자(痘者/천연두에 걸린 자)는 주수(駐守/머물러 지킴)하고,
   미두자(未痘者/천연두에 걸리지 않은 자)는 상(上)을 따라 환도(還都/수도로 돌아감)해야 합니다.
   불극(不克/함락하지 못 함)한다면, 곧 종병(縱兵/병을 풂)하여 그 촌(村)을 약탈(焚)하고 취(聚)하여,
   민항자(民降者/항복한 백성)는 편오(編伍/대오에 편성함)하고, 
   거자(拒者/거부하는 자)는 부(俘/사로잡음)하여 이로써 귀환(還)해야 합니다.
   각(各) 기(旗)가 헌부(獻俘/포로를 바침)하면, 우록(牛彔/니루)의 다과(多寡/많고 적음)함을 시(視/살핌)하고,
   병사(兵士)의 소획(所獲/획득한 것)은 자취(自取/스스로 취함)함을 청(聽/들어줌)해야 합니다.
   이와 같으면, 곧 사람마다 탐득(貪得/탐내어 얻음)할 것이고, 구박(驅迫/학대함)을 하지 않을 것이며,
   쟁출(爭出/출격을 다툼)하여 사재(私財/개인 재산)로 매마(買馬/말을 삼)할 것이며,
   병(兵)의 사기(氣)가 익양(益揚/더하여 오름)할 것입니다.
   수변(戍邊/변경을 지키는 일)은, 패륵(貝勒)은 번대(番代/순번에 따라 교대함)를 허(許)해야 하며,
   다른 장졸(將卒)은 번대(番代/순번에 따라 교대함)를 불허(不許)해야 합니다.
   노고(勞苦/애쓰고 노력한 수고로움)를 불내(不耐/견디지 못함)하면,
   어찌 능히(能) 척지(拓地/땅을 개척함)하고 공업(功業/공훈과 업적)을 성공(成)하는 자(者)가 있겠습니까?
   혹(或) 용병(用兵)의 수(數)를 일컬으며, 또 방농(妨農/농사일을 방해함)
   부자(婦子/처자)가 상수(相隨/뒤따름)하여, 한편으로 행(行)하며 한편으로 수확(穫)하면,
   어찌 방농(妨農/농사일을 방해함)이 있겠습니까?
   조선(朝鮮)과 찰합이(察哈爾)는 마땅히 또한 치(置/내버려 둠)하고,
   산해관(山海關) 밖의 영원(寧遠)과 금주(錦州) 역시(亦) 마당히(當) 완도(緩圖/느슨하게 도모함)하고,
   단지(但) 복지(腹地/내지)로 심입(深入/깊게 들어감)해야 합니다.
   복지(腹地/내지)를 이윽고 득(得)하면, 조선(朝鮮)과 찰합이(察哈爾)는 스스로 내부(來附/귀부하여 옴)할 것입니다.」
이때 여러 대신(大臣)의 소견(所見) 역시(亦) 약동(略同/대략 같음)하였는데,
태종(太宗)이 마침내 명(明)의 정벌(伐)을 정책(定策/책략을 정함)하였다.
[천총(天聰/후금 2대 한 홍 타이지의 #1연호)] 8년(1634년) 정월(五月)에,
다시 양고리(揚古利) 전후(前後)의 전공(戰功)을 기록(錄)하였고, 
초품공(超品公)으로 진급(進)하였고, 지위(位)는 패륵(貝勒)을 아(亞/버금감)하였고,
모정(帽頂/두건의 정수리)에 감주(嵌珠/진주를 끼워 넣음)하였다.



1633년에 태종이 여러 장수들에게 군사에 관한 일을 자문하니 양고리가 말하길
   <용병은 소홀히 하고 등한시함이 불가하니 만약 해를 넘겨 사용치 않는다면
    적이 그때를 잠시 틈타 정비하고 준비한다면 우리의 다시 일으킴을 그르칠까 걱정되나이다.
    우리가 여유가 있으면 1년에 두 번 정벌하고 여유가 없으면 역시 1년에 한 번 정벌하는 것이
    곧 가장 좋은 방책이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마땅히 적의 땅에 깊게 들어가 성보를 함락한다면
    패륵과 제장들로 이미 천연두에 걸린 자는 성보에 머물러 지키게 하고
    천연두에 걸리지 않은 자는 상(태종)을 따라 수도로 돌아와야 합니다.
    함락하지 못 한다면 곧 병력을 풀어 그 촌락을 약탈하여 취하고
    항복한 백성은 대오에 편성하며 거부하는 자는 사로잡아 이로써 귀환해야 합니다.
    각 기가 포로를 바치면 우록의 많고 적음을 살펴 병사가 획득한 것은 스스로 취해도 좋다고 들어줘야만 합니다.
    이와 같으면 곧 사람마다 탐내어 얻고자 할 것이고 포로를 학대하지 않을 것이며
    출격을 다퉈 개인 재산으로 말을 살 것이며 군의 사기는 더욱 오를 것입니다.
    변경을 지키는 일은 패륵만이 번대(순번에 따라 교대함)를 허락해야 하며 다른 장졸은 번대를 불허해야 합니다.
    노고를 견디지 못한 다면 어찌 능히 땅을 개척하고 공훈과 업적을 성공하는 자가 있겠습니까?
    혹 용병을 하게 되면 농사일을 방해한다 일컫는데
    군사를 따라 처자가 뒤따르며 한편으로 군사 일을 행하고 한편으로 수확하게 하면 어찌 농사일을 방해하겠나이까?
    조선과 찰합이는 또한 마땅히 내버려 두워야 하고 산해관 밖의 영원과 금주 역시 마당히 천천히 도모하고
    단지 명나라의 내지로 깊게 들어가야 합니다.
    내지를 이윽고 얻게 되면 조선과 찰합이는 스스로 귀부하여 올 것입니다.>
이때 여러 대신의 소견 역시 대략 같으니 태종이 마침내 명 정벌의 책략을 정하였다.
1634년 1월에 다시 양고리의 전후 전공을 기록하였고 초품공으로 진급하고 지위는 패륵에 버금가게 하였으며
두건의 정수리에 진주를 끼워 넣게 하였다.


요약.

1633년 태종(홍 타이지)은 제장들에게 군사 전략을 자문한다.

이때 양고리는 명나라에 틈을 주지 말고 매년 용병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성을 함락한다면 천연두에 걸린 장수들로 지키게 하고 나머지 제장들은 본국으로 회군하며

성을 함락하지 못한다면 병사를 풀어 대대적인 약탈을 행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통해 병사가 포로를 잡으면 그 포로는 병사의 소유가 되도록 해야

병사들이 적극적으로 전투에 나설 것이라 말한다.

용병할 때 농사일의 경우에도 처자와 노비 또한 동행하여 군사일과 농사일을 병행하면

무리가 없을 것이라 말한다.

또한 영원과 산해관은 공략하지 말고 몽고를 거쳐 명나라 내지로 들어가서 공략한다면

조선과 차하르는 그냥 놔둬도 청나라에 항복할 것이라 말한다.

태종은 양고리의 책략을 채택하였고 양고리를 일등초품공에 봉작한다.

이로써 양고리는 버이러에 버금가는 지위를 얻게 된다.

버이러에 버금가는 지위는 누르하치 대의 5대 개국공신 외에는 없었다.

이 당시 5대 개국공신들은 모두 사망한 상태였다.


-7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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