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고 양고리 열전 국역 9부-영원한 돌격대장으로 남다!(완결) 청사고 번역

안녕하세요. 길공구입니다.

몇몇 인물들에 대한 열전을 번역하고 있는데요.

오늘은 병자호란 당시 조선에서 전사한 최고위급 장수인 양고리, 만주어로는 양우리[yangguri]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1부-14세에 원수의 귀와 코를 씹어먹다! http://cafe.naver.com/booheong/158920

2부-300으로 적 1만을 상대하다! http://cafe.naver.com/booheong/158922

3부-사르후 전투의 1등 공신! http://cafe.naver.com/booheong/158925

4부-누르하치<전장에선 몸 좀 사리도록 하라!> http://cafe.naver.com/booheong/158927

5부-몽고를 거쳐 북경을 공략하다! http://cafe.naver.com/booheong/158957

6부-명은 매년 공격하고 조선은 놔둡시다! http://cafe.naver.com/booheong/158973

7부-3차 북경 포위전! 58번 싸워 모두 이기다! http://cafe.naver.com/booheong/158977

8부-태조의 돌격대장 조선에서 전사하다!(광교산 전투) http://cafe.naver.com/booheong/159029



청사고

왕올당, 왕고, 대선/다이샨, 태조 누르하치, 저영/추옝, 서이합제/슈르하치, 아이합제/야르하치 

피옹돈[비영동], 호호리[하화례], 어이두[액역도], 안퍙워[안비양고]훠르한/호이한부찰씨(푸차 군다이) 

영아이대/용골대/잉월다이액이덕니/어르더니 밬시



한세충이치, 양재흥, 동관[방랍], 채경, 부언경, 곽약사, 반미, 이사사고구송강장방창, 황잠선묘부(유정언)진회


금사


송서

 

원문 출처 : https://zh.wikisource.org/wiki/%E6%B8%85%E5%8F%B2%E7%A8%BF/%E5%8D%B7226



사전 보고 번역하는 것이라, 오역이 많습니다.

수정할 부분 알려 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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揚古利初事太祖,凡在行間,率先破敵,衝鋒挫銳,所向披靡。
太宗誡不令臨陣,而遇敵忘軀,奮發不自已。
行軍四十餘年,大小百餘戰,功業絕特,而持身尤敬慎。
太宗嘗命本牛彔護軍為之守門,賜豹尾槍二,以親軍二十人為衛。
其葬,以本牛彔八戶守冢。
是年十一月,追封武勳王,立碑墓道。
順治中,世祖命配享太廟。
康熙三十七年,聖祖巡盛京謁陵,親奠其墓。
三十九年,復建碑為文表績。
雍正九年,定世爵為一等英誠公。
揚古利子二:
長,阿哈旦,以軍功授拖沙喇哈番;
次,塔瞻,襲超品公,擢內大臣。
崇德六年八月,太宗親將禦明洪承疇 ,戰於錦州,敵遁,命塔瞻設伏追擊,斬獲甚眾。
尋移營松山,明總兵曹變蛟夜率兵突近御營,塔瞻不能禦,降一等公。
順治四年,卒,以其子愛星阿襲,愛星阿自有傳。
양고리(揚古利)가 초기(初) 태조(太祖)에 종사(事)함이, 무릇 행간(行間/공적록)에 있는데,
솔선(率先)하여 파적(破敵/적을 격파함)하였고, 충봉(衝鋒/적진으로 돌격함)하여 좌예(挫銳/적의 예봉을 꺾음)하였고,
향(向)하는 곳마다 피미(披靡/바람에 쓰러짐)하였다.
태종(太宗)이 계(誡/분부함)하여 임진(臨陣/전쟁터에 나섬)하지 못하도록 하였는데,
그러나 우적(遇敵/적을 만남)하면 망구(忘軀/몸을 돌보지 않음)하였고,
분발(奮發/마음과 힘을 다하여 떨쳐 일어남)하여 자기(自已/스스로 억제함)하지 않았다.
행군(行軍/군사 일을 행함)이 40여 년이고, 대소(大小) 100여전이었고,
공업(功業/공훈과 업적)이 절특(絕特/아주 특별함)하였고,
그럼에도 지신(持身/몸의 처신)은 더욱 경신(敬慎/공경하고 삼감)하였다.
태종(太宗)이 일찍이 명(命)하여 본(本) 우록(牛彔/니루)의 호군(護軍/바야랴 군)으로 하여금 수문(守門/문을 지킴)하게 하였는데,
표미창(豹尾槍/표범 꼬리를 단 창) 2개를 하사(賜)하였고, 친군(親軍) 20인으로써 위(衛/지킴)하게 하였다.
그 장례(葬)에, 본(本) 우록(牛彔) 8호(戶)로써 수총(守冢/묘를 지킴)하게 하였다.
이해 11월에, 무훈왕(武勳王)으로 추봉(追封/사후 봉함)하였고, 길에 비묘(墓)를 세웠다.
순치(順治/청 3대 황제 세조의 #1연호, 1643년~1661년) 중(中),
세조(世祖/청 3대 황제 애신각라 복림)가 명(命)하여 태묘(太廟)에 배향(配享)하였다.
강희(康熙/청 4대 황제 성조의 #1연호) 37년(1698년)에, 
성조(聖祖/청 4대 황제 애신각라 현엽)가 성경(盛京/청의 1대 수도, 심양)을 순행(巡)하여 알릉(謁陵/능을 배알함)하였는데,
친히(親) 그 묘(墓)에 전(奠/제사 지냄)하였다. 
[강희(康熙/청 4대 황제 성조의 #1연호)] 39년(1700년)에,
다시 표적(表績/특출난 공적)을 글로 써서 건비(建碑/비를 건립함)하였다.
옹정(雍正/청 5대 황제 세종의 #1연호) 9년(1731년)에, 
세작(世爵/세습 작위)을 정(定)하여 일등영성공(一等英誠公)으로 하였다.
양고리(揚古利)의 아들은 둘이다.
장자(長)는, 아합단(阿哈旦)이고, 군공(軍功)으로써 타사라합번(拖沙喇哈番)을 제수(授)받았다.
차자(次)는, 탑첨(塔瞻)이고, 초품공(超品公)을 세습(襲)하였고, 내대신(內大臣)에 발탁(擢)되었다.
숭덕(崇德/청 2대 황제 태종의 #2연호) 6년(1641년) 8월에,
태종(太宗)이 친장(親將/친히 장수가 됨)으로 명(明) 홍승주(洪承疇)를 방어(禦)하였는데,
금주(錦州)에서 싸워, 적(敵)이 둔(遁/달아남)하자,
명(命)하여 탑첨(塔瞻)은 설복(設伏/매복을 설치함)하고 추격(追擊)하게 하였는데,
참획(斬獲/참하거나 사로잡음)이 심중(甚眾/심히 많음)하였다.
잇달아 송산(松山)으로 이영(移營/영을 옮김)하였는데, 
명(明) 총병(總兵) 조변교(曹變蛟)가 야밤(夜)에 솔병(率兵/병을 인솔함)하여 
어영(御營/임금의 진영)을 돌근(突近/갑자기 가까이 옴)하자,
탑첨(塔瞻)이 방어(禦)를 하지 못하였고, 일등공(一等公)을 강등(降)하였다.
순치(順治/청 3대 황제 세조의 #1연호) 4년(1647년)에, 졸(卒)하였고,
그 아들 애성아(愛星阿)가 세습(襲)하였는데, 애성아(愛星阿)는 스스로의 열전(傳)이 있다.



양고리가 처음에 태조에게 종사한 것이 무릇 공적록에 있는데

솔선하여 적을 격파하였고 적진으로 돌격하여 적의 예봉을 꺾으니 향하는 곳마다 적이 바람에 쓰러지듯 하였다.
태종이 분부하여 전쟁터에 나서지 못하게 하였는데 
그러나 적을 만나면 몸을 돌보지 않고 분발하여 싸우는 것을 억제하지 못하였다.
40여 년 동안 전쟁터에 나가 크고 작은 전투를 한 것이 100여 회이고 공훈과 업적이 아주 특별하였는데
그럼에도 몸을 처신함에 있어서는 더욱 공경하고 삼갔다.
태종이 일찍이 명하여 본기의 우록(니루)의 호군(바야랴 군)으로 하여금 문을 지키게 하였는데
표미창(표범 꼬리를 단 창) 2개를 하사하였고 친위군 20인으로써 지키게 하였다.
그 장례에는 본기의 우록 8호로써 묘를 지키게 하였다.
이해 1637년 11월에 무훈왕으로 추봉(사후 봉함)하였고 길에 비묘를 세웠다.
순치(청 3대 황제 세조의 #1연호, 1643년~1661년) 중에 세조(청 3대 황제 애신각라 복림, 순치제)가 명하여 태묘에 배향하였다.
1698년에 성조(청 4대 황제 애신각라 현엽, 강희제)가 성경(청의 1대 수도, 심양)을 순행하여
능을 배알하였는데 친히 그 묘에 제사를 지냈다.
1700년에 다시 특출난 공적을 글로 써서 비를 건립하였다.
1731년에 세습 작위을 정하여 일등영성공으로 하였다.
양고리의 아들은 둘이다.
장자는 아합단이고 군공으로써 타사라합번을 제수 받았다.
차자는 탑첨이고 초품공을 세습하였고 내대신에 발탁되었다.
1641년 8월에 태종이 친히 장수가 되어 명나라 홍승주를 방어하였는데 금주에서 싸워 적이 달아나자
탑첨에게 명을 내려 매복을 설치하고 추격하게 하였는데 참하거나 사로잡은 것이 심히 많았다.
잇달아 송산으로 영을 옮겼는데 명나라 총병 조변교가 야밤에 군사를 인솔하여 임금의 진영을 갑자기 접근하였는데
탑첨이 방어를 제대로 하지 못해 일등공으로 강등하였다.
1647년에 졸하였고 그 아들 애성아가 세습하였는데 애성아는 스스로의 열전이 있다.


요약.

누르하치의 사위이자 홍 타이지의 매부인 양우리는 14세에 누르하치의 시위가 되어 

40여 년 동안 전장에서 몸을 사리지 않고 선봉으로 돌격대장이 되었다.

병자호란 당시 광교산에서 이름 모를 조선 조총병의 저격

목숨을 잃은 양우리는 누르하치의 능 옆에 묻히고 태묘에 배향되었다.

청나라 역대 황제들 또한 양우리의 공을 기렸다.

양우리의 아들은 아합단과 탑첨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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