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사 간신열전(7) 진회 열전 국역 3부-의심스러운 금나라 탈출! 송사 번역

안녕하세요. 길공구입니다.

몇몇 인물들에 대한 열전을 번역하고 있는데요.

오늘은 남송의 간신 진회에 대해 알아볼까 합니다.


1부-할지는 절대 아니되옵니다! http://cafe.naver.com/booheong/157242

2부-북송 멸망 최후의 충신 진회! http://cafe.naver.com/booheong/158570


<간신 열전>

1편 송사 간신열전 채경 http://cafe.naver.com/booheong/98808

2편 송사 간신열전 곽약사 http://cafe.naver.com/booheong/103206

3편 송사 환자열전 동관 [방랍 포함] http://cafe.naver.com/booheong/85702

4편 송사 간신열전 장방창(張邦昌) http://cafe.naver.com/booheong/140479

5편 송사 간신열전 황잠선(黃潛善) http://cafe.naver.com/booheong/141227

6편 송사 반신열전 묘부/유정언 http://cafe.naver.com/booheong/152079


<인물 열전>

송사

한세충이치, 양재흥, 동관[방랍], 채경, 부언경, 곽약사, 반미, 이사사고구송강장방창, 황잠선묘부(유정언)


금사


명사

두송 이성량


청사고

왕올당, 왕고, 대선/다이샨, 태조 누르하치, 저영/추옝, 서이합제/슈르하치, 아이합제/야르하치 

피옹돈[비영동], 호호리[하화례], 어이두[액역도], 안퍙워[안비양고]훠르한/호이한부찰씨(푸차 군다이) 

영아이대/용골대/잉월다이액이덕니/어르더니 밬시양고리/양우리


송서

원문 출처 : https://zh.wikisource.org/wiki/%E5%AE%8B%E5%8F%B2/%E5%8D%B7473


사전 보고 번역하는 것이라, 오역이 많습니다.

수정할 부분 알려 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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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月,金人立邦昌為偽楚。

邦昌遺金書請還孫傅、張叔夜及檜,不許。

初,二帝北遷,檜與傅、叔夜、何㮚司馬朴從至燕山,又徙韓州。

上皇聞康王即位,作書貽粘罕,與約和議,俾檜潤色之。

檜以厚賂達粘罕。

會金主吳乞買以檜賜其弟撻懶為任用,撻懶攻山陽,建炎四年十月甲辰,檜與妻王氏及婢僕一家,自軍中取漣水軍水砦航海歸行在。

丙午,檜入見。

丁未,拜禮部尚書,賜以銀帛。

檜之歸也,自言殺金人監己者奔舟而來。

朝士多謂檜與㮚傅、朴同拘,而檜獨歸;

又自燕至楚二千八百里,逾河越海,豈無譏訶之者,安得殺監而南?

就令從軍撻懶,金人縱之,必質妻屬,安得與王氏偕?

惟宰相范宗尹、同知樞密院李回與檜善,盡破群疑,力薦其忠。

未對前一日,帝命先見宰執。

檜首言

「如欲天下無事,南自南,北自北」,及首奏所草與撻懶求和書。

帝曰:

「檜朴忠過人,朕得之喜而不寐。

蓋聞二帝、母后消息,又得一佳士也。」

宗尹欲處之經筵,帝曰:

「且與一事簡尚書。」

故有禮部之命。

從行王安道、馮由義、水砦丁禩及參議官並改京秩,舟人孫靖亦補承信郎。

始,朝廷雖數遣使,但且守且和,而專與金人解仇議和,實自檜始。

蓋檜在金庭首唱和議,故撻懶縱之使歸也。

[정강(靖康/북송 9대 황제 흠종의 #1연호) 2년(1127년)] 3월에, 

금인(金人)이 장방창(邦昌)을 위초(偽楚/가짜 초)로 입(立/세움)하였다.

장방창(邦昌)이 금(金)에 서신(書)을 유(遺/전함)하여 손부(孫傅) 및 장숙야(張叔夜)와 더불어 

진회(檜)의 귀환(還)을 청(請)하였는데, 불허(不許)하였다.

처음에, 이제(二帝/휘종과 흠종)가 북천(北遷/북쪽으로 옮김)하였는데,

진회(檜)는 손부(傅), 장숙야(叔夜), 하율(何㮚), 사마박(司馬朴)과 함께 종(從/따름)하여 연산(燕山)에 이르렀는데,

또 한주(韓州)로 사(徙/옮김)하였다.

상황(上皇/휘종)이 강왕(康王)이 즉위(即位)하였다는 것을 듣고는,

작서(作書/서신을 씀)하여 점한(粘罕/종한)에게 이(貽/전함)하였고, 

더불어 화의(和議)를 약조(約)하였고, 진회(檜)를 시켜 윤색(潤色/윤이 나도록 매만져 곱게 함)하게 하였다.

진회(檜)가 후뢰(厚賂/뇌물을 두텁게 줌)로써 점한(粘罕)과 달(達/통함)하였다.

때마침 금주(金主/금 황제) 오걸매(吳乞買/금 2대 황제 태종 우치마이)가 진회(檜)로써 

그 동생 달라(撻懶)에게 하사(賜)하여 임용(任用/직무를 맡겨 등용함)하였는데,

달라(撻懶)가 산양(山陽)을 공격(攻)하였고, 
건염(建炎/남송 1대 황제 고종의 #1연호) 4년(1130년) 1월 갑진일(甲辰)에, 

진회(檜)가 처(妻) 왕씨(王氏)와 더불어 비복(婢僕/계집종과 사내종) 일가(一家)와 함께,

군중(軍中)에서부터 연수군(漣水軍) 수채(水砦)를 취(取)하고 항해(航海)하여 행재(行在/임금이 있는 곳)로 귀(歸/돌아옴)하였다.

병오일(丙午)에, 진회(檜)가 입현(入見/들어와 알현함)하였다.

정미일(丁未)에, 예부상서(禮部尚書)를 배(拜/벼슬을 줌)하였고, 은백(銀帛/은과 비단)으로써 하사(賜)하였다.

진회(檜)의 귀환(歸)은, 자언(自言/스스로 말함)하길 

금인(金人)의 감기(監己/몸을 감시함)하는 자(者)를 죽이고 분주(奔舟/배로 달아남)하여 왔다 하였다.

조사(朝士/조정에 몸을 담고 있는 신하)가 많이 일컫기를

진회(檜)는 하율(㮚), 손부(傅), 사마박(朴)과 더불어 동구(同拘/함께 잡힘)하였는데,

그러나 진회(檜)만 독귀(獨歸/혼자 돌아감)하였다 하였다.

또 연(燕)으로부터 초(楚)까지 2800리(里)에 이르는데, 유하(逾河/강을 지남)하고 월해(越海/바다를 건넘)하였는데,

어찌 기가(譏訶/책하고 꾸짖음)하는 자(者)가 없고, 어떻게 살감(殺監/감시자를 죽임)하고 남쪽으로 올 수 있었겠는가?

설령 달라(撻懶)를 종군(從軍)하였다 하더라도, 금인(金人)이 종(縱/내버려 둠)하게 하였으며,

필히(必) 처속(妻屬/아내)을 인질(質)로 하였을 것인데, 어떻게 왕씨(王氏)와 함께 할 수 있었겠는가?

오직 재상(宰相) 범종윤(范宗尹)과 동지추밀원(同知樞密院) 이회(李回)만이 진회(檜)와 더불어 선(善/친함)하였고,

군의(群疑/뭇사람의 의심)를 진파(盡破/모두 깨뜨림)하였고, 그의 충(忠)을 역천(力薦/힘껏 추천함)하였다.

장차 대면(對)하기 하루 전에,제(帝)가 명(命)하여 먼저 재집(宰執/재상)을 보게 하였다.

진회(檜)가 수언(首言/절하여 말함)하길

「만일 천하무사(天下無事)하고자 하신다면, 남(南)은 남(南)대로, 북(北)은 북(北) 대로 해야 하나이다.」

더불어 달라(撻懶)와 함께 초안(草)한 구화(求和/화친을 구함)의 서신(書)을 수주(首奏/머리 숙여 바침)하였다.

제(帝)가 말하길

「진회(檜)의 박충(朴忠/순박하고 충직함)함이 과인(過人/보통 사람보다 뛰어남)하니,

  짐(朕)은 기쁨을 얻어 불매(不寐/잠을 이루지 못 함)하노라.

  대략(蓋) 이제(二帝/휘종과 흠종)와 모후(母后)의 소식(消息)을 들었고,

  또 한 명의 가사(佳士/아름다운 선비)를 얻었도다!」

범종윤(宗尹)은 경연(經筵)으로 조처(處)하고자 하였는데, 제(帝)가 말하길

「또한 일사(一事)를 간(簡/분간함)하는 상서(尚書)를 주고자 한다!」

이런 연고(故)로 예부(禮部)의 명(命)이 있었다.

종행(從行/뒤를 좇아감)한 왕안도(王安道)와 풍유의(馮由義)는 수채정사(水砦丁禩)와 더불어 참의관(參議官)으로 삼고,

아울러 경질(京秩/중앙 관직)로 개(改/고침)하였다.

단인(舟人/뱃사람) 손정(孫靖) 또한 승신랑(承信郎)에 보(補/채움)하였다.

앞서, 조정(朝廷)이 비록 수차례(數) 견사(遣使/사신을 보냄)하였으나,

단지(但) 또 수(守/지킴)하고 또 화친(和)하였는데,

오로지 금인(金人)과 더불어 해구(解仇/원한을 풂)하고 의화(議和/화친 논의)는,

실로(實) 진회(檜)로부터 시작(始)되었다.

대개(蓋) 진회(檜)가 금정(金庭/금나라 조정)에 있으면서 의화(和議/화친 논의)를 수창(首唱/제일 먼저 주창함)하였기에,

이런 연고(故)로 달라(撻懶)가 종(縱/놓아 줌)하고 돌아가게 한 것이다.



1127년 3월에 금나라 사람이 장방창을 위초(가짜 초나라)로 옹립하였다.

장방창이 금나라에 서신을 전하여 손부, 장숙야와 더불어 진회의 귀환을 청하였는데 불허하였다.

처음에 두 황제(휘종과 흠종)가 북쪽으로 옮겼는데 진회는 손부, 장숙야, 하율, 사마박과 함께

두 황제를 따라 연산(연경)에 이르렀다가 또 한주로 옮겼다.

상황(휘종)이 강왕이 즉위하였다는 것을 듣고는 서신을 써서 점한(종한)에게 전하였고

더불어 화의를 약조하게 하였는데 진회를 시켜 윤색하게 하였다.

진회가 뇌물을 두텁게 줌으로 인하여 점한과 통하였다.

때마침 금주(금 황제) 오걸매(금 2대 황제 태종 우치마이)가 진회를 그 동생 달라에게 하사하여 등용하게 하였다.

달라가 산양을 공격하였는데 1130년 1월 1일에 진회가 처 왕씨와 더불어 계집종과 사내종 일가와 함께

군중에서부터 연수군 수채를 취하고 바다를 항해하여 행재(임금이 있는 곳)로 돌아왔다.

1월 3일에 진회가 들어와 알현하였다.

1월 4일에 예부상서를 제수하고 은과 비단을 하사하였다.

진회의 귀환은 스스로 말하길

   <금나라 사람의 감시하는 자를 죽이고 배로 달아나 왔다!>

하였다.

조정의 신하들이 많이 일컫기를

   <진회는 하율, 손부, 사마박과 더불어 함께 잡히었는데 진회만 혼자 돌아왔다!>

하였다.

   <연산으로부터 초주까지는 2800리에 이르는데 강을 지나고 바다를 건넜는데

    어찌 금나라에서 책하고 꾸짖는 자가 없고 어떻게 감시자를 죽이고 남쪽으로 올 수 있었겠는가?

    설령 달라를 따라 종군하였다 하더라도 금나라 사람이 멋대로 내버려 둘 수 있었겠으며

    반드시 처를 인질로 삼았을 것인데 어떻게 왕씨와 함께 올 수 있었겠는가?>

오직 재상 범종윤과 동지추밀원 이회 만이 진회와 더불어 친하였고

뭇사람의 이심을 모두 물리쳤으며 그의 충심을 힘껏 추천하였다.

장치 황제와 대면하기 하루 전에 황제가 명하여 먼저 재상을 보게 하였다.

진회가 절하며 말하길

   <만일 천하가 태평하고자 하신다면 남은 남대로, 북은 북대로 해야 하나이다!>

더불어 달라와 함께 초안한 화친을 강구하는 서신을 머리 숙여 바쳤다.

황제가 말하길

   <진회의 순박하고 충직한 성품이 보통 사람을 뛰어넘으니 짐은 기쁨에 겨워 잠을 이루지 못하노라!

    대략 두 황제와 모후의 소식을 들었고 또 한 명의 아름다운 선비를 얻었도다!>

범종윤은 경연관으로 조처하고자 하였는데 황제가 말하길

   <또한 한 가지 일을 분간할 상서직을 주고자 한다!>

이런 연고로 예부상서의 명이 있었다.

진회를 따라온 왕안도와 풍유의는 수채정사와 더불어 참의관으로 삼고 아울러 중앙 관직으로 고쳤다.

뱃사람 손정 또한 승신랑에 임명하였다.

앞서 조정이 비록 수차례 금나라에 사신을 보냈으나 단지 지키거나 또 화친하였는데

오로지 금나라와 더불어 원한을 풀고 화친을 하자는 논의는 실로 진회로부터 시작되었다.

대개 진회가 금나라 조정에 있으면서 화친 논의를 제일 먼저 주창하였기에

이런 연고로 달라가 놓아 주고 돌아가게 한 것이다.


요약.

1127년 3월 마침내 금나라의 첫 번째 괴뢰국 장방창의 초나라가 세워진다.

장방창은 금나라에 진회의 귀환을 청하였으나 당연히 불허되었다.

진회는 휘종, 흠종을 따라 연산을 거쳐 한주로 옮겨진다.

강왕이 즉위했다는 소식을 들은 휘종은 자신을 풀어달라는 서신을 종한에게 전하였는데

그 서신을 윤색한 자가 진회였다.

진회는 서신을 전하면서 종한에게 뇌물을 바쳐 환심을 샀다.

금 태종 오걸매(우치마이)는 진회를 동생 달라에게 보내 임용하게 하였다.

1129년 달라가 남송을 공격할 때 진회를 참군사로 삼아 종군케 하였는데

1130년 1월 1일에 진회가 연수군 정사수채에서 배를 타고 탈출하여 남송 월주에 도착한다.

진회의 믿기지 않은 탈출은 남송 신료들의 의심을 받게 된다.

그러나 북쪽으로 끌려가기 전 진회의 강직함을 본 재상 범종윤의 비호로 진회는 고종을 알현하게 된다.

진회는 고종에게 달라와 초안을 잡은 화친 협상의 문서를 바치며

금을 인정하고 화친을 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부모 및 처가 모두 금에 붙잡혀 있던 고종에게는 진회가 천군만마와 같은 존재와 같았다.

실상 진회의 탈출은 금나라의 온건 세력이던 달라가 화친 협상을 위해 일부러 풀어준 것이었다.


-4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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