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청실록 6부-청 태종 통곡하고 또 통곡하다! 병자호란 이야기

안녕하세요. 길공구입니다.

그간 원초적 만주어 사서 만문노당의 맨 마지막 부분, 즉 1636년 11월~12월 병자호란 관련 부분을 번역하여 연재하였는데요.

만주어 사서 만문노당은 1636년이 마지막입니다.

하여 이후의 내용은 한문사서 청실록 태종 문황제실록을 틈틈이 번역해 볼까 합니다.


1부-청태종 남한산성을 둘러보다 http://cafe.naver.com/booheong/158624

2부-아녀자같이 숨느냐? 만세의 웃음거리다! http://cafe.naver.com/booheong/158680

3부-소국의 왕이 대국의 황제에게 간곡히 청하나이다. http://cafe.naver.com/booheong/158738

4부-한족 3왕의 화포부대 도착http://cafe.naver.com/booheong/158759

5부-조선의 반격 광교산 전투와 양고리 전사! http://cafe.naver.com/booheong/159115


병자호란 만주어 만문노당 1부~65부 http://cafe.naver.com/booheong/158623


청실록 원본 출처 : http://sillok.history.go.kr/mc/main.do


사전 보고 번역하는 것이라, 오역이 많습니다.
수정할 부분 알려 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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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실록 태종문황제 1637년 1월 8일

○戊申和碩豫親王多鐸率軍進擊朝鮮兵時敵已棄馬夜遁營內虛無人獲馬千一百有四十是日舁楊古利屍至

上哭之慟群臣屢勸不止親臨其喪。奠酒賜御服黑貂裘套帽鞾殯之仍哭不止群臣固勸。

上始還營

○무신일(戊申)에, 화석예친왕(和碩豫親王) 다탁(多鐸)이 솔군(率軍/군을 인솔함)하여 

조선병(朝鮮兵)을 진격(進擊/진군하여 공격함)하였다.

이때 적(敵)이 이미(已) 기마(棄馬/말을 버림)하고 야둔(夜遁/야밤에 도주함)하여,

영내(營內)가 허(虛/빔)하고 무인(無人/사람이 없음)하였고, 말 1140마리를 획득(獲)하였다.

이날에 양고리(楊古利)의 시신(屍)을 여(舁/마주 듦)하여 이르니,

상(上/임금, 태종 홍 타이지)이 곡(哭)하고 애통(慟)해 하니 

군신(群臣/뭇 신하)이 누차(屢) 권(勸)하였으나 부지(不止/그치지 않음)하였다.

그 상(喪)에 친림(親臨/친히 임함)하여 전주(奠酒/제주를 올림)하였고,

어복(御服/임금의 의복)과 흑초구(黑貂裘/검은색 담비의 모피로 만든 갖옷) 및 

모화(帽鞾/두건과 가죽신)를 하사(賜)하여 투(套/씌움)하고는 빈(殯/염함)하게 하였다.

거듭 곡(哭)하며 부지(不止/그치지 않음)하니 군신(群臣/뭇 신하)가 고권(固勸/완고하게 권함)하니,

상(上/임금, 태종 홍 타이지)이 비로소 환영(還營/영으로 돌아옴)하였다.



1637년 1월 8일 화석예친왕 다탁(도도)이 군을 인솔하여 진군하여 조선군을 공격하였다.

이때 적이 이미 말을 버리고 야밤에 도주하여 군영 내가 텅 비어 한 사람도 없었고 말 1140마리를 획득하였다.

이날에 양고리의 시신을 마주 들고 이르니 

상(홍 타이지)이 곡하고 애통해 하니 뭇 신하가 누차 그만하시라 권하였으나 그치지 않았다.

그 초상에 친히 임하여 제주(제삿술)를 올렸고 어복과 검은색 담비 갖옷, 두건, 가죽신을 하사하여 염하게 하였다.

거듭 곡하며 그치지 않았는데 뭇 신하들이 완고하게 그만하시라 권하니 상(홍 타이지)이 비로소 군영으로 돌아왔다.


요약.

1637년 1월 7일 광교산 야간 전투에서 태조 누르하치의 사위이자 태종 홍 타이지의 매부

돌격대장 양우리(양고리)가 전사한다.

1월 8일 도도는 군을 인솔하여 광교산으로 밀고 올라간다.

그러나 이미 전라도 근왕병의 선봉 김준용의 부대는 후퇴하고 없었다.

도도군은 조선군이 버리고 간 말 1140마리를 포획한다.

한편 양우리의 시신을 발견한 도도는 광교산을 내려간다.

양우리의 시신을 본 태종은 통곡하였고 뭇 신하들이 말렸으나 그치지 않았다.

홍 타이지는 자신의 어복과 물품을 내려주어 양우리를 염하게 하고는 

그 초상에 임하여 또다시 통곡을 그치지 않았다.

뭇 신하들이 홍 타이지를 걱정하여 완고하게 말리니 그제서야 태종은 본영으로 되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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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기록에 의한 당시 광교산의 전라도 근왕병의 선봉 김준룡의 부대


조선왕조실록 1637년 1월 5일 기사中

전라 병사 김준룡이 치계하여 승전 소식을 전하다

전라 병사 김준룡(金俊龍)이 군사를 거느리고 구원하러 들어와 광교산(光敎山)에 【경기의 수원(水原)과 용인(龍仁) 사이에 있다.】 주둔하며 전투에 이기고 전진하는 상황을 치계(馳啓)하였다. 당시 남한 산성이 오래도록 포위되어 안팎이 막히고 단절되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구원병의 소식이 잇따라 이르렀으므로 성 안에서 이를 믿고 안정을 되찾았다.


승정원일기 1637년 1월 5일 기사中

전라 병사 김준룡이 광교산에 도착하여 접전을 벌이고 있고 기회를 보아 현릉으로 전진할 계획이라는 내용으로 장계를 올렸다

전라 병사(全羅兵使) 김준룡(金俊龍)이, 광교산(光敎山)에 도착하여 여러 차례 접전을 벌여 승리하는 일이 꽤 있었고 바야흐로 기회를 보아 헌릉(獻陵)으로 전진할 계획이라는 일로 올린 장계가 들어왔다.


조선왕조실록 1637년 1월 9일 기사中

김반이 아뢰기를,

“이의배(李義培)는 머뭇거리며 진격하지 않았고, 이시방(李時昉)은 김준룡(金俊龍)을 구원하지 않아 광교(光敎)에서 패배를 당하게 하였으니, 모두 분통스럽기 짝이 없습니다. 두 사람을 처벌하여 군율을 밝히소서.”


동명집 제15권 비갈(碑碣) 북병사 김공의 묘명〔北兵使金公墓銘〕

그해 12월에 청나라 군사가 갑작스럽게 쳐들어와 상께서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행행하였다. 공은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변란의 소식을 듣고는 곧바로 영하(營下)의 군대를 거느리고 행군하면서 열읍의 군사를 거두어 밤낮없이 달려갔다. 기읍(畿邑)에 이르러 광교산(光敎山)에 진을 치고는 때때로 정예병을 내어 약탈하러 나온 오랑캐들을 쳤다.

오랑캐들이 새벽녘에 삼군(三軍)을 합하여 안개가 낀 틈을 타고 곧장 침범하여 오자, 군사들의 얼굴이 흙빛이 되었다. 공은 부월(斧鉞)을 잡고 싸움을 독려하였는데, 오랑캐들이 쏘는 화살이 비가 오듯이 쏟아졌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피하라고 권하였으나, 듣지 않은 채 더욱더 급하게 싸움을 독려하였다. 적들이 물러갔다가 황혼녘에 또다시 몰래 뒤쪽 고개를 넘어와서는 산꼭대기를 점거하였다. 이에 공은 직접 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올라가 그 봉우리를 빼앗았다. 그때 오랑캐 장수 하나가 탄환에 맞아 죽었는데, 적군이 모두 통곡하였으므로 어떤 장수가 죽었는데 저처럼 통곡을 하는가 하고 괴이하게 여겼다. 나중에 한흥일(韓興一)이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자, 청나라 사람들이 ‘동국과의 전쟁에서는 광교산의 전투가 가장 치열하여 백양고라(白羊高羅)가 죽었다.’라고 하였다. 백양고라라는 자는 관직이 높고 또 용략(勇略)이 있어 무오년(1618, 광해군10)에 요동을 함락시킨 자였다.

백양고라를 죽이고 오랑캐의 장수 몇 사람을 계속하여 죽였다. 하루 종일 크게 싸워 오랑캐들이 패배하였는데, 시체가 삼대가 쓰러진 것 같았다. 2경이 지난 뒤에 적들이 그 시신을 모두 불태우고 몇 리 밖으로 물러났다. 이에 사기가 백배는 충천하여 다시 싸울 만하였다. 그러나 군량과 화살이 다 떨어졌으므로 다시 쳐들어올 경우에는 반드시 패할 것이 염려되었다. 이에 횃불을 늘어세워서 군사들이 있는 것처럼 보이고는 몰래 군사를 빼내어 고개를 넘어 수원(水原)으로 향하였다. 다음 날에 오랑캐들이 과연 크게 쳐들어왔으나, 군영은 이미 텅 비어 있었으므로 몹시 놀라며 귀신 같다고 하였다. 그런데 방백이 공의 군대가 패하였다고 아뢰었다. 공은 체포되어 중죄를 받게 되었으나, 유배형으로 낮추어졌다. 그때 마침 여러 사람이 모여 모두 사실을 말함에 따라 마침내 석방되었다. 공은 공을 세우고서도 무함을 당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원통하다고 하였다. 그런데도 공은 이를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공의 도량에 탄복하였다.


기언 별집 제17권 구묘문(丘墓文) 증(贈) 좌찬성 김공(金公) 신도비명(神道碑銘)

오랑캐들이 진격과 퇴각을 반복하여 하루 종일 양군이 온 힘을 다해 싸웠다. 그러는 가운데 오랑캐의 날랜 기병이 아군의 후방에 있는 고개를 몰래 넘어가 상봉을 먼저 점거하고는 화살을 비 오듯 쏘아대기 시작했다. 공이 급히 용사 수백 명을 출격시키고 상봉을 앞다투어 오르게 하면서,

“지금이 바로 충신이 나라에 보답할 때이다.”

하니, 육박전에 나선 군사들이 모두 일당백(一當百)으로 싸웠다. 오랑캐 가운데 갑옷을 입고 깃발을 잡고 있던 자가 봉우리 위로 말을 타고 올라가 서더니 큰 깃발을 세우고 군사들에게 호령을 내리자 군사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공이 그자를 가리키며,

“저놈을 죽이지 못하면 적들이 물러나지 않을 것이다.”

하면서 더욱 싸움을 독려하여 총포를 일제히 쏘아 대게 하니, 깃발을 잡고 군사들에게 호령을 내리던 자와 좌우에 서 있던 추장들 가운데 함께 탄환에 맞아 죽은 자가 여러 명이었고 오랑캐 군사들 가운데 죽은 자들이 즐비하여 그 수를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반면에 아군의 전사자는 겨우 수십 명에 불과했다. 크게 패한 오랑캐가 산에서 내려와 곳곳에 시체를 쌓아 놓고 이를 태우니 오랑캐 군중이 곡소리로 가득하였으며, 시각은 밤 2경이 거의 다 되었다. 공이 군중을 둘러보니 탄환이 이미 다 떨어졌고 군량미도 고갈되어 아침에 오랑캐가 필시 대거 들이닥칠 터인데 그렇게 되면 감당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군진을 이동하여 군사들을 쉬게 할 생각으로 사방에 횃불을 벌려 놓아 마치 군사들이 있는 양 속여 놓고 야음을 틈타 몰래 군사를 이동하였다. 아침이 되어 오랑캐가 대거 들이닥쳤으나 보루들은 이미 텅 비어 있는 상태였고, 적들은 복병이 있을까 두려워 감히 따라오지 못하였다. 이때 전사한 오랑캐의 패장 백양고라(白羊高羅)는 지위가 높은 오랑캐 장수로서, 전투를 잘하고 전공을 많이 세워 선칸(先汗)이 사위로 삼아 오랑캐들로부터 추중을 받는 인물이었다.

한편 아군이 행군을 하던 도중에 적들로부터 야습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자 군중이 혼란해지면서 큰 소리로 외쳐 대기를,

“주장(主將)을 위해 이미 온 힘을 다해 싸워 적들에게 승리를 거두어 놓고도 아무런 원조도 받지 못한 채 졸지에 이런 변고를 당하고 말았으니 이렇게 부질없이 죽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하고는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 공이 휘하의 기병 수백 명과 함께 수원(水原)에 이르렀으나 군사가 없어 남쪽으로 내려가 다시 군사를 모아 다음을 도모하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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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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