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산성 당시 아군의 수급으로 공을 세우려던 장교 김언림 병자호란 이야기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는 인조와 1만4천의 조선군이 고립되어 있었습니다.

조선군은 몇 차례 소규로 병력으로 성밖으로 나가 청군과 격전하였고 대부분 패전하였지요.

고립과 패전으로 성내 군사기는 매우 떨어져 있었는데 

이 와중에 어영 별장 김언림과 박월생이 밤중에 성을 나가 적의 머리 2급을 베어 오는 전공을 세웁니다.

인조는 이를 칭찬하고 명주 3필을 하사합니다.

적의 수급은 군문에 매달게 하였지요.

헌데 이때 원주의 과거 합격자인 권려가 적의 수급 중 하나를 빼앗더니

펑펑 눈물을 흘리며 자기의 형 권위의 목이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임시 군사령부에 해당하는 도체부에서는 김언림과 박월생을 참수하여 효시하라고 청하였고

인조는 사람을 죽인 것은 아니니 사형은 면하는 게 어떻겠느냐 말하지요.

그러나 김언림을 군사들이 매우 혐오하고 있다고 말하며 죽이지 않으면

군 사기에 큰 문제가 있을 것이라는 말에 결국 사형을 명합니다.

결국 김언림의 목은 참수되어 군문에 효시됩니다.



연려실기술 병자노란과 정축 남한출성 中

○ 10일에 김상헌에게 명하여 온조묘(溫祚廟)에 제사를 지냈다. 

별장 김언림(金彦琳)이 밤에 성을 나가 두 사람의 목을 베어 가지고 오니, 김류가 나와 앉아 그 목을 받고, 

임금이 상으로 면주(綿紬) 3필을 주고 그 목을 군문에 매달도록 명하였는데, 

머리에 한 점의 피도 없어 사람들이 자못 괴이하게 여겼다. 

조금 있다가 어떤 원주(原州) 장관이 그 머리를 빼앗아 품안에 안고 울면서 말하기를, 

형님이여, 어찌 두 번 죽는 데 이르렀습니까.” 

하였다. 지난 번 북문 싸움에서 적의 칼날에 죽은 자였으니, 

사람들이 모두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드디어 언림을 군사들이 보는 앞에서 베었다.



승정원일기 1637년 1월 10일 기사中

공을 탐하여 윗사람을 속인 김언림을 군중에 효시할 것 등을 청하는 도체부의 계

또 아뢰기를,

“‘오늘 새벽녘에 김언림(金彦琳), 박월생(朴月生) 등이 스스로 말하기를, 「밤에 적진에 들어가 적의 수급 2급(級)을 베어 가지고 왔다.」고 하여 가져오게 하여 살펴보았더니, 살은 얼어 있고 피도 흐르지 않는 데다 잘린 머리 모양이 진짜 적의 것 같지 않아 몹시 의아해하던 참이었는데, 출신(出身) 권려(權儷)가 앞으로 나와 울며 호소하기를 「우리 형님 권위(權偉)가 일전에 북문 밖에서 전사하였는데 아무리 시체를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중에 1급이 우리 형님의 머리가 분명하니, 가지고 가도록 허락해 주십시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즉시 어영대장 원두표(元斗杓)에게 추문(推問)하게 하니, 박월생 등이 하나하나 바른대로 공초(供招)하여 감히 숨기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이 공을 탐하여 윗사람을 속인 죄가 가릴 수 없이 분명하니, 만약 효시하지 않는다면 처치하기가 매우 곤란합니다. 김언림, 박월생 등을 군중(軍中)에 효시하여 다른 이들을 경각시키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비록 그 정상이 매우 가증스럽지만 산 사람을 참살한 것과는 차이가 있으니 사형은 면하는 것으로 논죄하는 것이 어떻겠는가?’라고 전교하셨습니다. 이번 김언림의 소행은 산 사람을 참살한 것과 차이가 있는 듯하지만 그 마음의 흉악함은 실로 다를 것이 없습니다. 게다가 군사들도 모두 몹시 혐오하고 있어 그들 스스로 남들에게 용납될 수 없음을 잘 알고 있으므로 필히 난처한 문제가 생길 것이니, 이들을 효시하여 무리들을 경각시키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박월생은 김언림의 꾐에 빠진 것입니다. 주범과 종범은 죄의 경중에 차이가 있을 듯하니 곤장을 치는 것이 마땅합니다. 감히 아룁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전교하였다.



청장관전서 병정표(丙丁表) 인조 14년 1637년 1월 기록中

10일 상이 예조 판서 김상헌(金尙憲)을 보내어 온조왕의 묘당에 제사지내게 했다. 

간인(奸人)인 어영별장(御營別將) 김언림(金彦霖)을 효시했다. 

심기원ㆍ민성휘 등이 양근(楊根)의 미원(薇園)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메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