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강화도 함락 재구성 병자호란 이야기

여러 기록을 검토하여 병자호란 당시 강화도 함락을 재구성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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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4일 마푸타 선봉대 한양 도착 (1)
-인조 김경징을 검찰사, 이민구 부검찰사로 강화도 보냄 (2)
12월 16일
-왕실 광성진 통해 강화도 들어옴 (3)

-김경징, 이민구 역할
 1. 인조와 왕실이 건너갈 도로와 배편 마련 (4)
 2. 강화도 병력 지휘권 없음(감찰 역할만) (4)
-인조 최상원 및 승려를 보내 강화도 수륙 방어 총 책임자 강화유수 장신 임명 (5)
-장신 청군이 강화도 해협을 건너지 못할것이라 확신 (6)
-장신 김경징과 의견 대립 (7)

1월 10일
-4차 좌익군 도르곤+호오거 남한산성 도착 (8)
-6차 후미군 두두+한족3왕군+우전초오하(한군) 홍이포+각종병기+수레 남한산성 도착 (9)

1월 16일
-홍 타이지 로오사+우바이 1차 선봉대 300으로 본국 귀환 명령 (10)
-선봉 150은 개성 주둔, 나머지 150은 본국 귀환했다가 병력 더하여 개성에 주둔하여 20척 배 수송로 확보 명령 (10)
-본국 수비 지르갈앙 등에게 강화도 함락시킬 배 20척 2월10일한으로 건조하라 명령 (10)

1월 18일
-홍 타이지 도르곤에게 1니루 갑사10(갑사3300+쿠툴어1650=총4950여명 추정)으로 강화도 함락하라 명령 (11)
-육로로 6차 후미대가 가져온 선박건조용 자재 44척~80척+홍이포 가져가라 명령 (12)

1월 21일
-늦은 저녁 도르곤 강화도 해안 도착 (13)
-수레에서 자재를 내려 배 조립 시작 (13)
-조익 검찰소에 있던 김경징, 장신, 강진흔을 만나 청군이 작은 배로 도강하니 막아야 한다 건의 (14)
-강진흔 검찰사들 젖먹이들이라며 비난 (15)
-21~23시 장신 수육군 병력 소집하여 광성진으로 이동, 강진흔 연미정으로 이동 (16)
-봉림대군 이민구에게 적정 탐색하라 지시, 이민구 갑곳에서 건너편 청군 진영의 불빛 봄 (17)

-당시 강화도 수비 상황
 1. 광성진 장신+강화 수군 판옥선 등 27척(병사891여명 + 비전투1485여명 추정) (18)
 2. 연미정 강진흔+충청 수군 판옥선 등 7척(병사232여명 + 비전투385여명 추정) (18)
 *구범진 <병자호란 시기 강화도 함락 당시 조선군의 배치 상황과 청군의 전력>에 의하면
  당시 1척의 승선인원은 병사 약 33명, 비전투인원 55명
 3. 육군 : 김경징이 1월 22일 이른 아침에 병력 70~80 이끌고 갑곳으로 감 (19)
           이 병력 포함 황선신이 조총병 113명을 이끌고 광성진 수비하러 감 (20)

-당시 강화도 해협 상황
 1. 갑곳 주변 결빙기로 얼음이 떠다님(한강, 임진강, 예성강물 합류지점) (21)
 2. 광성진은 얼음이 조금 있으나 도강 원활 (22)


1월 22일
07:00경
-해 출몰시간 07:17분(김창환님의 달력 1.5버전 참고) (23)
-동틀 무렵 청군 문수산에 군영 설치, 연기 피어남 (24)
-이른 아침 김경징 70~80명 이끌고 갑곳으로 이동 (25)

09~11시
-도르곤 해안에서 홍이포 사격 개시 (26)
-동시에 작은 배 44척 도강 준비(각이 진 우반 모양으로 작은 배, 거의 뗏목 수준) (27)(28)
-청 조악한 배 44척, 1척 당 5~6명 승선하고 서서 상앗대질 하며 결빙구간 도강(노를 저은 것이 아님) (29)
 도강 청군 병력 44척*6명=264여명 추정, 계속 왕복할 상앗대꾼 최소 44명.
 강화 북쪽 갑곳 해협은 수심이 낮고 조류가 빨라 작은배와 상앗대(삿대)로 이동이 가능 (30)
-봉림대군, 김상용, 이상길, 조익, 여이징, 유성증, 이일상, 이행진 갑곳 도착 (31)
-연미정 충청수군7척 갑곳으로 이동하려 하였으나 급류에 휘말려 정박, 제어 불능 (32)
-강화수군 27척 광성진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려 하였으나 조수에 밀려 전진 불능 (33)
-광성진을 지키던 황선신 조총병 113명 황급히 북진하여 갑곳 주변에 포진 (34)

11~13시
-김경징 언덕 위에서 광성진의 장신에게 기를 흔들어 출동 독촉 (35)
-청군이 중간쯤 건너오자 봉림대군 강화성에서 병력을 더 끌고 오겠다 말하고 떠남 (36)
-조총병 일제 사격 개시, 청군에 도달 못함 (37)
-청군 설어+쇼잔이 2~3척의 배로 수십 명의 보병을 이끌고 첫 도강 (38)
-첫 배에서 5~6명의 청군이 뭍에 상륙하자마자 활을 들어 언덕 위의 조선군에게 발사 (39)
 3척이 상륙하고 몇 명의 조선군이 화살에 맞아 죽자 조선군 도주 시작
-청군 추격하여 조선군 100여 명 죽임 (40)
-갑곳에 있던 조선 관리들(김경징 포함) 도주 시작 (41)
-해안가에서 강화도 일부 어민들 배를 타고 탈출 시작, 해안에 있던 관리들 배 얻어타고 도주 시작함 (41)

※ 인조의 말에 의하면 당시 강화도의 조선군 총 병력은 1천 (42)

이후
-청군 도강 완료
-강화도성 포위
-강화 군민 1천 항전, 섬멸
-관리 및 아녀자+어린이 상당수 자폭, 목을 맴
-청군 관아 포위 도르곤 봉림대군과 협상 제안
-협상완료(봉림대군 이하 260여명 안전보장, 강화도민 살육 금지)
-1월 26일 강화도에서 나와 육지로 감






근거 출처
(1) 만문노당 1636년 12월 19일 기사
(2) 동주집 <판서 정세규에게 보내는 답장>
(3) 동주집 <판서 정세규에게 보내는 답장>
(4) 동주집 <판서 정세규에게 보내는 답장>
(5) 동주집 <판서 정세규에게 보내는 답장>
(6) 동주집 <판서 정세규에게 보내는 답장>
(7) 동주집 <판서 정세규에게 보내는 답장>
(8) 청실록 1637년 1월 10일 기사
(9) 청실록 1637년 1월 10일 기사
(10) 청실록 1637년 1월 16일 기사
(11) 청실록 1637년 1월 18일 기사
     갑사 추정은 https://cafe.naver.com/booheong/168224 참고
(12) 44척은 마푸타 발언 승정원일기 1637년 2월 7일, 8일 기사
     80척은 청실록 1637년 1월 24일 기사
     수레로 배 육로 수송은 청실록 1637년 1월 24일 기사, 동주집 <판서 정세규에게 보내는 답장>
(13) 동주집 <판서 정세규에게 보내는 답장>, 포저집 <병정기사>
(14) 명재유고 <이조판서 송곡 조공 행장>
(15) 명재유고 <이조판서 송곡 조공 행장>
(16) 동주집 <판서 정세규에게 보내는 답장>
(17) 동주집 <판서 정세규에게 보내는 답장>
(18) 판옥선은 동주집 <판서 정세규에게 보내는 답장>
     충청수군 7척, 강화수군 27척은 동주집 <판서 정세규에게 보내는 답장>
     판옥선 병력 추정은 구범진 <병자호란 시기 강화도 함락 당시 조선군의 배치 상황과 청군의 전력>
(19) 포저집 <병정기사>
(20) 동주집 <판서 정세규에게 보내는 답장>
(21) 구범진 <병자호란 시기 강화도 함락 당시 조선군의 배치 상황과 청군의 전력>
(22) 구범진 <병자호란 시기 강화도 함락 당시 조선군의 배치 상황과 청군의 전력>
(23) 김창환님 달력 1.5 1637년 1월 22일 일출시간
(24) 동주집 <판서 정세규에게 보내는 답장>
(25) 포저집 <병정기사>
(26) 동주집 <판서 정세규에게 보내는 답장>
(27)(28) 포저집 <병정기사>, 청실록 1637년 1월 23일 기사, 승정원일기 1637년 2월 7일, 8일 기사
(29) 내국사원당 숭덕2년 1637년 1월 23일 기사
(30) 구범진 <병자호란 시기 강화도 함락 당시 조선군의 배치 상황과 청군의 전력>
(31) 동주집 <판서 정세규에게 보내는 답장>
(32) 동주집 <판서 정세규에게 보내는 답장>
(33) 동주집 <판서 정세규에게 보내는 답장>, 조선왕조실록 2월 21일 기사
(34) 황선신 113명 동주집 <판서 정세규에게 보내는 답장>
     황선신 수백명 조선왕조실록 1637년 1월 22일 기사
     조선 조총병 100명 청실록 1637년 1월 23일 기사
(35) 포저집 <병정기사>
(36) 동주집 <판서 정세규에게 보내는 답장>
(37) 포저집 <병정기사>
(38) 조선왕조실록 2월 21일 기사, 청실록 1637년 7월 17일 기사
(39) 포저집 <병정기사>
(40) 청실록 1637년 1월 22일 기사
(41) 동주집 <판서 정세규에게 보내는 답장>, 포저집 <병정기사>
(42) 승정원일기 1637년 1월 29일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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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청군 병력 현황 요약
-대장 : 도르곤(도강 병력)+두두(44척 조립용 배 운반)
-병력 : 갑병 3300명, 쿠툴어 1650명 추정 = 약 5천여 명
-병기 및 배 : 배 44척, 홍이포 약 4문(우전 초오하 부대 소유용)
-첫 도강 병력 : 갑병 약 264명 추정 + 왕복할 상앗대꾼 최소 44명 = 308 여명.

조선군 병력 현황 요약
-방어 총 책임자 : 강화 유수 장신
-군 감찰사 : 김경징, 이민구
-수군 판옥선 등 34척, 병력 군사 1122명 + 노젓는 군민(강화도 백성 포함) 1870명 이하 추정
-육군 총 병력 113명 추정
-인조의 말에 의하면 강화도의 병력은 1천

남북의 수군의 패착
1. 갑곳은 결빙 구간으로 못 건너갈 것이라 확신
2. 갑곳 북쪽 연미정의 수군7척은 급류에 휘말려 제어 불능
3. 광성진 수군 27척 북쪽으로 이동하려 하였으나 조수에 밀려 전진 불능

몇몇 기록만으로 본 김경징은
1. 인조의 명령에 의해 강화 수비 총 책임자는 강화유수 장신
2. 김경징은 단지 감찰사일뿐 병력 지휘권이 없었음
3. 병력 포진 및 구성은 강화유수 장신이 계획함
4. 김경징은 청군이 도강 직전까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음, 사실 할 게 별로 없었음.
5. 청군이 도강하고 해안가의 조선 관리들이 배를 타고 도주할 때 같이 도주하였음
6. 이래나 저래나 봉림대군 및 왕실을 모두 강화도에 버리고 도주한 죄목
7. 당시 강화도에 있던 조익이 본 김경징은 1월 19일~21일간 하는 일이 없는데도 문서 등을 처리하고 있었음.
8. 강화도의 관군과 남자들이 모두 징발되어 의병으로 차출되어 강화 수비는 수군에 맡길 수밖에 없었음

-끝-

P.S) 강화도의 병력이 1천뿐이라는 인조의 말, 의병에 차출되어 강화도를 지킬 남자가 없었다는 말을 종합하면
     청이 기록한 청실록의 상륙하여 섬멸한 1백 조총병, 1천 매복군 중 매복군은 강화도 군민으로 추정하였으나
     실상 강화도성에 들어가 살육한 백성들의 수가 아닐까 싶다.
     더이상 병력이 없는데 1천 명의 매복군이 어디서 솟아난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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