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으로 가는 배로 강화도와 가도를 함락하다! 병자호란 이야기

병자호란 당시 청군은 두 번 수군을 사용하였습니다.

1637년 1월 22일 강화도 점령

1637년 4월 09일 가도 점령


사실 이 당시만 해도 청 만주족에게 수군은 따로 있질 않았습니다.

배는 그저 강을 건너는, 조선에 와서는 바다를 건너는 수송선에 불과하였지요.

청나라 수군?의 장점은 바로 해상으로 움직이는 배가 없고

어디선가 갑자기 뚝딱하고 배가 만들어지는 마술을 부린다는 것입니다.


강화도의 방어 총사령관이자 수군 대장 장신이 청군이 절대 강(바다)을 건널 수 없었다고 자신한 이유도

아마 청군의 배가 인근 해상에 보이질 않았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실상 후금과 청 시절 만주족들은 강을 건널 때 배를 현지 조달한 것이 아니고

자재를 육로로 수송하여 뚝딱하고 만들었습니다.

만주족 퉁극신의 경우만 해도 와르카 정벌전에 9척, 차하르 정벌전에 24척, 강화도 점령시에 44척을 

건조하였는데 이를 홍 타이지는 <퉁극신 형식의 배>라고 정의까지 내렸습니다.

차하르 정벌전에는 황하를 건너게 되었는데 퉁극신은 그 자리에서 8척을 만들어서 병력을 실어 나르게 하였고

병력이 도강하자 그 자리에 남아 16척을 추가로 건조합니다.

퉁극신은 이 공으로 3등 갑라장경으로 승진되고 세습도 6번이나 허용 받습니다.


청과 조선의 기록을 살펴보면 강화도와 가도 공략에 나선 배는 거의 뗏목 수준의 배로 전방에는 방패가 설치되어 있고

수송인은 20명 전후입니다.


강화도를 함락한 배는 44척인데 이 배들도 모두 청 6차 후미대가 육로로 수송한 배들입니다.

실상 배를 만들 나무였겠지요.

1월10일 배 재료를 남한산성으로 들고온 두두는 1월18일 도르곤과 함께 다시 육로를 이용하여 강화도로 갑니다.

1월 21일 밤늦게 강화도 앞 문수산에 도착한 청군은 곧바로 선박 건조에 돌입합니다.

마침내 1월 22일 09시경 해안가에서 홍이포가 발사되고 청 44척의 도강이 시작됩니다.

청군이 상앗대질을 하며 최단거리인 갑곳으로 도강하자 북쪽 연미정, 남쪽 광성진의 조선 수군은

당황하게 되고 서둘러 갑곳으로 향하다 모두 조류에 휘말려 청군의 도강을 막을 수 없게 되었지요.

강화도 함락 직후 청군이 남한산성으로 돌아가자 조선인들이 남아 있는 배를 모조리 불태워 버렸지요.


가도 함락전에는 청군의 배 51척과 조선의 배 4척이 동원되었던 것 같습니다.

역시 육로로 수송되었는데 당시 가도 정벌전에 동원되었던 평안도 병사 유림은 이를

<유산선(踰山船)>이라고 인조에게 보고합니다.


넘을 유(踰), 메 산(山), 배 선(船)..... 즉 산을 넘어가는 배



조선왕조실록 1638년 7월 12일 기사中

평안도 병사 유림(柳琳)이 하직 인사를 하였다. 상이 그를 불러 보고는 가도가 함락될 때의 일을 물으니, 유림이 아뢰기를,

“가도의 서쪽은 육지와 20여 리가 연결되고 가운데에 산 하나가 있습니다. 마부달(馬夫達)이 산을 의지해 포진하고 작은 배 70척과 우리 배 4척을 취하여 수레에 싣고 산을 넘었는데도 중국인들은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일시에 돛을 달고 북을 치며 나아가 방비하지 않았을 때 엄습하니, 중국인들이 놀라 흩어져서 대항하지도 못하고 마침내 함락되어 남자 1 만여 명이 거의 피살되었습니다.”


속잡록 1637년 3월 9일 기록中

병사 유림이 말을 달려 아뢰기를, “본월 9일 첫새벽에 8왕자(八王子)가 신을 불러 산으로 올라가서 저쪽 섬이 함몰된 것을 보자고 하므로 함께 산에 올라 바라본즉 그 섬의 포구에 한선(漢船 명 나라 배)이 돛을 달고 서해(西海)로 향하는 것이 46척이요, 동해(東海)로 향하는 것이 20척이며, 섬 안의 곳곳에는 연기와 불꽃이 하늘에 치솟으므로 청병(淸兵)에게 물어본즉 어제 모집된 청병이 먼저 섬 안으로 들어가서 한인(漢人)을 쳐죽이고 관사(館舍) 및 도독(都督)의 가사(家舍)를 불태웠다.”하였습니다. 이어 또 듣기를, “청병이 전일에 신이 계한 유산선(踰山船)에 짐을 싣고 밤을 이용하여 바다를 건너니 섬 안에서 아무런 설비를 하지 않고 있으므로 서변에서 육지로 내려가 불의에 엄습하고, 이어 먼저 주봉(主峯)의 위를 점거했기 때문에 도병(島兵)이 속히 패했다는 것입니다. 동해ㆍ서해로 지향하는 배는 각 도 각 관에 신칙하여 자세히 살펴보고 놓아 보내지 말게 하며, 양서(兩西)의 감사ㆍ병사ㆍ통어사(統禦使) 및 충청 수사(忠淸水使)에게도 아울러 알고 있도록 하시는 것이 어떻겠사옵니까. 또 조선(漕船)이 올라올 때에 각별히 호송하는 일은 회계(回啓)한 대로 시행하겠습니다.”하였다.

○ 또 평안 감사가 장계하였는데, 아래와 같다.

이 시각에 병영(兵營)의 초관(哨官) 김성일(金誠一)이 진중으로부터 와서 말하기를, “8일 저녁때 청병이 유산선(踰山船) 51척에다 스스로 모집에 응한 정예 보병을 가득 싣고 마부대로 대장을 삼아 밤 10시 경에 바다를 건너 몰래 섬 서쪽의 방비 없는 한 모퉁이를 습격하였습니다. 그래서 자정 무렵에 접전이 되어 어둠 속에 다만 고함치는 소리만 들렸었는데 날이 밝아 바라보니 청병이 성 안에 들어가 불지르고 소탕하여 연기와 불꽃이 크게 일어났습니다. 청장(淸將)은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날이 밝기 전에 먼저 섬동ㆍ남쪽으로 나가고, 임경업(林慶業)은 수군을 영솔하여 청 나라 배의 뒤에 있었습니다. 도중(島中)의 작은 배 40여 척이 동쪽 기슭에 매어 있으니 한인(漢人) 남녀가 분주히 다투어 올라가다가 많은 수가 추락되어 떠 있는 시체가 바다를 덮었고, 또 40여 척이 외양(外洋)으로 지향할 때에 전선(全船) 여섯 척이 청병과 부딪치게 되어 배에 가득 찬 사람이 거의 다 피살되었습니다.


<홍 타이지가 점령을 명한 가도, 대화도, 신미도>





전투 개요는 다음과 같습니다.

1. 3월 8일 유산선을 이끌고 가도 앞산으로 청군 이동, 배 51척 뚝딱 제작

2. 조선 수군은 해상으로 이동?

3. 3월 8일 밤 10시경 51척이 가도 상륙, 가도 난리 남

4. 3월 9일 새벽 아지거, 쇼토 조선 유림을 데리고 산에 올라 가도 공방전을 구경함

5. 3월 9일 동틀무렵 중앙 처르거이, 동북쪽 마푸타의 배도 가도에 상륙함


*후에 가도 함락전 당시 선발되어 가도에 1차로 상륙한 부대에 대해서 글을 써볼게요.

 당시에 가도의 명나라 군이 논 것은 절대 아니고 나름 방비하였으나 불시에 청군이 상륙하자

 1차 상륙부대와 가도의 명군 사이에 처절한 전투가 시작됩니다.

 이때 청나라 전사자가 상당수 발생하였지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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