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르하치 시작부터 건국까지 간략한 몇줄 요약 누르하치 관련 이야기

-명의 가장 골칫거리는 몽고 부족

어찌 됐든 몽고 부족 연합군 때려잡던 이성량은 요동에서 절대 권력 획득


-이성량 여진족 철저한 분열정책 취함

당시 여진족은 약 70개 부족으로 흩어져 있었고 인구는 대략 50만 전후

명은 분열정책을 위해 15세기 칙서 1500통을 여진족 추장 300여 명에게 나눠주고 교역 허가증으로 씀

칙서를 가져야 담비가죽, 인삼, 꿀, 말 등을 가지고 명 관문으로 가서 쌀, 의복, 소금과 교환 가능

칙서 1장당 교역수량 제한됨

여진 내부에서 치열한 칙서 쟁탈전 발생함, 명은 묵인함.


-당시 여진족은 크게 3개(해서여진, 건주여진, 야인여진)

해서여진은 예허, 하다, 호이파, 울아 4부족, 명과 국경지대 및 옛 금나라 생여진 영토

건주여진은 만주, 완안, 동고 등 압록강 유역

야인여진은 훠르하, 노토, 와르카 등 두만강 및 동해에 살던 부족들, 여진족은 동해여진이라 부름

칙서는 예허500통, 하다 500통, 건주 500통으로 명 인접 부족들이 싹쓸이함

칙서 쟁탈전을 통해 점차 통일 전쟁 가속화


-부족 통합전이 가속화되면서 하다 부족이 강성하여 영고탑(누르하치의 조부들)까지 굴복시킴

건주여진에서는 왕고, 왕올당이 인근 부족을 인솔하여 수천 병력으로 명을 약탈하다 이성량에게 토벌당함

하다가 약해지고 해서여진의 최강자로 예허가 급부상함

이성량 예허부족의 두 국주를 칙서를 미끼로 유인하여 죽임, 두 국주의 아들 이성량에게 굴복

왕고의 아들 아타이(아태)가 이성량에게 복수하기 위해 요동을 약탈함

이성량 통역관 니칸 와이란을 향도삼아 아타이 토벌전을 감행함


-누르하치 부족 건주위 실태

누르하치의 할아버지인 교창아의 6형제를 영고탑(닝우타, 만주어 뜻은 6 수령)이라 부름.

명목상 건주위 수장이던 영고탑 일족이 하다에게 굴복한 후 세력이 쪼그라듦

일족이 동원 가능한 병력은 500명 내외

영고탑 일족은 왕고 휘하에 들어감

왕고가 이성량에게 죽임을 당하고 아타이가 복수전을 감행함.

아타이는 교창아의 손녀사위임.


-구러산성 공방전

이성량이 니칸 와이란을 향도삼아 아타이의 구러산성을 포위함

교창아 손녀가 걱정돼 아들 탘시(누르하치의 부친)와 함께 구러산성 들어감

구러산성이 함락되지 않자 이성량 니칸 와이란을 협박함

니칸 와이란 말로 구러산성의 부족민들을 현혹시켜 부족민들 성주 아타이를 죽이고 항복

명군의 피해가 막심했던 이성량 전공을 위해 구러산성 부족민을 모조리 학살함

이 와중에 교창아와 탘시도 학살당함


-당시 누르하치

누르하치 계모 나라 컨저(하다 일족)의 학대를 받아 18세에 동가씨 부인과 결혼과 동시에 분가함

동생 슈르하치도 따라간 것으로 보임

당시 부친 탘시의 본거지는 허투 알아, 아버지로부터 노비 남자6, 여자5, 말2, 소4마리만 받음

처가인 동가씨 가문으로 가서 직접 인삼을 채취하여 명에 파는 등 스스로 고생했다고 말함.

6년 후 아버지가 구러산성 공방전에서 살해되자 본성 허투 알아로 돌아옴

허투 알아에는 병력100명과 갑옷 13벌이 있었음.

당시 여진족은 갑옷이 귀해 군사력의 측정 기준이 되었음.


-이성량 교창아와 탘시 의도치 않게 죽였다고 사과하고 누르하치에게 칙서 30통 선물

누르하치 니칸 와이란을 원수로 규정하고 거병함

30갑옷과 병력100으로 니칸 와이란의 거성 투룬성을 공격함


-영고탑 및 건주위 통일

거병 1년 만에 일족 영고탑 통일전에 돌입하여 병력 100에서 병력 400으로 증강함

영고탑 일족 등 상당수가 누르하치를 죽이려 함.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일족을 통일하고 건주위 통합전을 개시하여 

거병 6년 만에 건주위를 통일하고 병력 수천으로 증강

1588년 누르하치 칙서500통 획득


-여진 5국체계 확립

누르하치가 건주위를 통일하자 여진은 5개국으로 급격히 재편성 됨

예허(병력1만), 울아(병력1만), 하다(병력 수천), 호이파(병력 수천), 건주(병력 수천)

누르하치 조선에 임진란이 발발하자 명에 충성 표시로 참전 희망, 조선의 거부


-누르하치 포위망 발동

누르하치가 병력을 수천까지 늘리자 혼인 동맹 중인 예허와 울아가 회합하여

신분이 미천한 누르하치가 자신들과 동격이 되려 한다며 응징 결의

사신을 누르하치에게 보내 땅을 내놓으라 협박

누르하치 거부하자 1593년 9부족 3만 연합군이 건주를 포위하여 공격함

누르하치가 격파하고 연합군 4천을 죽임

울아 국주 만타이의 동생 부잔타이 생포함.

놀란 예허, 울아, 하다, 호이파 누르하치에 화친 제안, 삽혈 동맹 거행

예허 일족의 딸을 누르하치에게 시집보내겠다 약속.


-누르하치 명에 충성을 맹세하고 북경에 직접 가서 조공도 함

1595년 병력이 1만5천까지 증강, 명 여희원과 조선의 하세국이 건주를 방문하고 용호장군에 임명.

누르하치 기병 5천과 보병 1만을 도열시키고 10km 마중 나옴.


-동해여진(야인여진) 쟁탈전

누르하치의 급격한 병력 증강은 싹쓸이 약탈전에 기인함

누르하치는 정복한 부족민을 모조리 본거지 주변으로 끌고 와 정착시킴

특히나 소부족들이 난립한 동해여진은 누르하치의 먹잇감이 됨

그러나 이 무렵 울아의 부잔타이 또한 동해여진 쟁탈전에 돌입함

울아의 부잔타이는 누르하치에게 생포된 후 누르하치의 사위가 되어 인질 생활을 하다

형 만타이가 내분으로 죽게 되자 누르하치의 후원으로 귀국하여 울아 국주가 됨

현존 울아 족보에 의하면 이들은 자신들을 생여진의 적통 완안씨의 후예라 주장하기도 함.

당시 울아는 명과 교역하기 위해선 예허나 건주를 거쳐야만 했고

하여 자체적인 교역 및 약탈을 위해 1만 병력으로 동해여진을 공격하고 조선 종성을 침공함

당시 조선의 기록에는 울아군이 검붉은 갑옷으로 무장했다고 함.

동해여진족들이 부잔타이의 학정에 시달리다 누르하치에게 구원을 요청하여 

누르하치와 부잔타이의 전쟁이 시작됨.

당시 울아군은 최대 원정군 1만, 수비군 3만까지 동원 가능하였음.

누르하치군은 울아군을 대파하고 마침내 동해여진 쟁탈전의 승자가 됨

누르하치가 1625년까지 동해여진에서 끌고 온 인구수만 대략 5만 명이나 됨

덕분에 동해 여진족은 텅텅 비어 조선에서는 동북방 일대의 여진족들이 모두 사라졌다고 보고함.


-여진 통일전

1599년 하다를 합병하고 칙서 360통 추가 확보

1607년 호이파에 이어 1613년초 3만 대군으로 울아마저 멸망시킨 누르하치는

예허를 제외한 모든 여진족을 통합하고 본성 허투 알아 인근 100km(반경50km)이내에 

모든 부족민을 정착시킴.

누르하치 1613년 9월 4만 대군으로 예허 침공

위기를 느낀 예허 명에 구원요청, 명에서 1천 조총병 파견, 만력제 누르하치 경고장 발송.

누르하치 명의 개입에 위기를 느껴 직접 무순성으로 가서 이영방을 만나고 재차 명과의 불가침 맹세를 함.


-팔기군 확립

1615년 병력을 6만(기병4만)까지 증강한 누르하치는 팔기군을 확립함.

누르하치는 자신이 8기군 중 2기, 차남 다이샨에게 2기, 조카 아민에게 1기, 아들 망월타이에게 1기, 

아들 홍 타이지에게 1기, 손자(추옝의 아들) 두두에게 1기(두두의 나이가 어려 명목상)


-장남 처형

누르하치 1612년 울아 정벌전에 전념하기 위해 장남 추옝을 집정으로 삼아 내정을 맡김

추옝 버이러들인 이복형제들과 5대신들에게 자신에게 충성 맹세하라 협박함.

이복형제들+5대신들 누르하치에게 고발장

누르하치 추옝에게 경고, 울아 정벌전에 추옝 제외, 본성 수비를 맡김.

추옝 누르하치 저주, 측근들 배반하여 누르하치에게 고발, 2년 감금후에 1615년 8월 추옝 처형.


-여진왕 선포

1616년 1월 1일 4대 버이러와 5대신 및 8기의 장수들이 누르하치에게 칭호 올림.

누르하치 칭호를 [쿤둘언 한]에서 [겅옌 한]으로 바꿈.

즉 이제 건주1국의 한(왕)이 아닌 여진 전체의 한(왕)이라 선언함.

[후금] 건국 언급은 전혀 없고, 연호 [천명] 사용도 일절 없음.


-대명 전쟁 개시 및 후금 선포

1618년 2월 누르하치는 버이러들과 5대신들에게 명과의 전쟁을 결정했다고 통보, 전쟁을 준비하라 지시

3월 비밀리에 공성용 사다리 제작 돌입

4월 누르하치 군사 전략 버이러들과 대신들에게 설명

4월 13일 누르하치 하늘에 7 대(大) 원한을 고하고 팔기군 10만이 준비되었다며 전쟁 선포.

2만을 무순성으로 보내 함락, 이영방 투항, 한족 병사 1~2만 얻음.

한족 포로 30만을 팔기군 6만으로 허투 알아로 옮김


-명의 반격 사르후 전투

누르하치 명에 자신을 여진왕으로 봉하고 7대원한에 대해 사과하며 

여진 통일전에 간섭하지 않는다고 약조하면 전쟁을 멈추겠다고 제안

명 예허, 조선에 전쟁 준비 협조 요청하고 대규모 병력 집결 준비

누르하치 첩보를 입수하고 국경지대 사르후에 1만5천 인부를 보내 축성개시.

1619년 2월 24일 명 경략 양호 누르하치에게 경고장을 보내 

3월 15일 47만 대군으로 8로로 진격하겠다 선전포고.

이미 4로 병진 시작되어 명나라 8만8천, 예허 1만, 조선 1만3천 이동 중, 3월 2일 후금 영내 진입 예정.

(예비 병력 양호 1만5천, 조선 말 수송대 5천)

3월 1일 아침 [두송(2만9천)]과 [유정+조선(2만7천)], [마림+예허(3만4천)]이 

영내로 진입했다는 급보 누르하치에게 전달.

누르하치 고민하다 유정군엔 수비 5백, 마림군엔 2백을 보내고

나머지 전군(6만)은 두송이 공략 중인 사르후의 1만5천 인부를 구출하기 위해 07~09시에 사르후로 진격

60km 거리를 8시간 만에 돌파한 후금군은 오후 5시경 마침내 두송군과 격돌, 대파

이어 마림군을 격파하고 예허는 도주, 

팔기군 본성 허투 알아로 일시 귀환했다가 곧바로 남쪽으로 향하여 푸차에서 유정군과 조선군 격파.

조선군 1만3천 원정군 중 9천 전사, 강홍립 항복

이여백군 곧장 회군, 사르후 전투 종료.

3일 동안 후금군의 이동거리 약 240km


-건국과 연호 사용

사르후 전투 직후부터 국명 [후금]과 연호 [천명]을 언급하기 시작함.

연호는 조선에 보낸 국서에 따르면 1618년을 기점으로 1619년을 천명2년으로 기록하기도 하고

첫 거병한 년도인 1584년을 기점으로 천명 36년을 거론하는 등 뒤죽박죽임.

시기가 좀 흐른 뒤에 1616년 1월 1일을 건국과 연호 선포로 고정시킴.





덧글

  • 외세결탁 신라와 한국 2018/09/25 23:03 #

    고대로 치면 해서 여진은 부여가 있던 곳이고 건주 여진은 맥 그리고 동해 여진은 옥저 또는 읍루가 있던 곳이군요.
    고려에 통합되었다가 발해와 요 그리고 금을 거쳐 저런 분포가 되었군요.
※ 로그인 사용자만 덧글을 남길 수 있습니다.


메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