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친남자 진만인적 한세충 열전 종합 번역 송사 번역

원문 : 송사 한세충 열전


1. 낭랑 18세 천하 호걸 한세충 군에 사병으로 입대하다!


한세충의 자는 양신이고 연안 사람이다.

풍채와 골격이 장대하고 몸놀림은 번개와 같이 재빨랐다.

어린 나이에 맹금과 같은 사나운 용기가 범인을 뛰어넘었고 야생말과 망아지를 능히 탈 수 있었다.

집이 가난하여 생업이 없는데도 술 마시길 좋아하였고 항상 기백이 넘쳤는데 법으로 속박함이 불가하였다.

점쟁이가 말하길 마땅히 삼공이 된다 하니 한세충은 자신을 업신여긴다 여겨 노하여 점쟁이를 때렸다.

18세에 용맹이 있어 향주에서 군에 응모하여 중앙군에 배속되었는데

활을 강하게 당기며 달리면서 활을 쏘니 삼군에서 용맹으로 으뜸이 되었다.



2. 서하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워 장교가 되다!


1105년에 서하가 소동을 일으키자 변경의 고을에서 군사를 조련하여 방어하였는데

한세충도 파견되어 그 중에 있었다.

은주에 이르러 서하인이 스스로 굳게 농성하자 한세충이 관문을 부수고 적장을 죽여

머리를 성가퀴 밖에 던지니 이에 각 군이 성에 올라 서하를 대파하였다.

얼마 안 있어 서하의 강군이 호평령에 주둔하였는데 한세충이 정예를 인솔하여

격렬하게 싸우니 서하가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잠시 후에 한세충이 죽음을 각오한 병사들을 거느리고 샛길로 나와 사투를 벌이니 적이 조금 물러났는데

뒤돌아 보니 한 기병 무사의 날카로운 기세가 심하였는데 사로잡은 자에게 물어보니 말하길

   <감군 부마 올위이다!>

한세충이 말을 질주하여 참하니 적이 크게 무너졌다.

경략사가 그 공을 올리자 당시 동관이 변경의 일을 감독하였는데 

전공을 더하고 거짓으로 꾸몄는지 의심하여 녹봉을 1급 올리는데 그치자 무리가 공평하지 않다 하였다.

유연경을 따라 천강산채를 쌓았는데 후에 적이 근거지로 삼으니

한세충이 밤에 성에 올라 2명을 참하고 호성전을 베어 바쳤다.

계속하여 불구채에서 적과 조우하여 또 여러 명을 참하니 비로소 진의부위(무품 무산계)에 임명되었다.

장저하에 이르러 3명을 참하고 진용부의(무품 무산계)로 영전하였다.



3. 진 만인적 칭호를 받고 방랍을 사로잡다.


1120년에 방랍이 반란을 일으켜 강과 절을 진동케 하니 사방에서 병사를 뽑아 조련하였는데

한세충이 왕연의 편장이 되어 토벌하였다.

항주에 머물렀는데 적이 문득 이르렀고 적의 군세가 심히 대단하였는데

대장이 매우 두려워하여 계책이 없었다.

한세충이 병력 2천으로 북관의 둑에 매복하였다가 적이 지나가자 기습하니 적이 혼란에 빠져 서로 짓밟혔다.

한세충이 추격하니 적이 패하여 달아났다.

왕연이 감탄하며 말하길

   <진 만인적이다!>

모두의 의견을 좇아 백금의 그릇을 상으로 내리고 또한 서로 가깝게 지내기로 정하였다.

이때 조서가 내려왔는데 능히 방랍의 머리를 얻는 자는 강과 절의 절월을 내리겠다 하였다.

한세충이 방랍을 쫓아 목주의 청계동에 이르자 적이 세 개의 깊은 굴에 거처를 삼으니

여러 장수들이 계속하여 이르렀으나 들어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

한세충이 계곡에 몰래 들어가 아녀자에게 물어 지름길을 얻고는

곧 창에 의지하여 곧장 앞으로 나아갔고 험한 곳 수 리를 건너 마침내 그 동굴을 발견하고는

들어가 수십 명을 죽이고 방랍을 사로잡아 나왔다.

신흥종이 병력으로 동굴의 입구를 막게하고 방랍의 생포를 자기 공으로 탈취하였는데

이런 연고로 한세충에게 포상이 내리지 않았다.

다른 장수 양유충이 궐에 돌아와 그 일을 직언하니 비로소 한세충은 승절랑(정9품 무관)으로 영전하였다.



4. 실패한 북벌! 50 vs 2000 무쌍을 찍다!


1122년에 연산(연경, 현 북경)의 회복을 논의하여 여러 군사를 뽑아 이르렀으나 곧 모두 궤멸되었다.

한세충이 (총사령관) 유연경에게 가니 유연경은 소격 등 50기와 함께 호타하를 지키게 하였다.

요나라 병사 2천여 기가 몰려오자 소격은 어찌할 바를 몰라 하였는데

한세충이 침착하게 소격 등에게 높은 언덕에 진열하라 하고는

병사들에게 동요하지 말라 일침을 가하였다.

때마침 연산에서 패전하여 배를 타고 도주하는 병사들을 만났는데

곧 명을 내려 강기슭에 배를 대게 하고는 북을 치고 함성을 질러 기세를 올리길 약속하며

곧장 단기로 말을 질주하여 적에게 접근하였는데 말을 타는 것이 꼭 나는 것 같았다.

적이 2대로 나누어 높은 언덕에 근거하였는데 한세충이 불시에 돌입하여 깃발을 들고 있는 2명을 사로잡으니

이로 인하여 용기를 얻은 소격 등이 협공하였으며

수군 병졸들도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니 적이 크게 동요하여 퇴각하니 추격하여 참한 것이 심히 많았다.



5. 단기로 만 명을 굴복시키다!


이때 산동과 하북에서 도적이 봉기하였는데 한세충이 왕연, 양방평을 따라 도적을 토벌하여 거의 사라지게 되었고

전공으로 무절랑(종7품 무관)으로 옮겼다.

흠종이 즉위하자 양방평을 따라 준주에 주둔하였다.

금나라 군이 국경까지 접근하자 양방평이 방비가 엄하지 않았는데,

금나라 군이 닥치게 되자 곧장 달아났고 관군 수만이 모두 흩어졌다.

한세충이 여러 겹의 포위를 당하게 되었는데 창을 휘들러 힘껏 싸워 돌파하고

포위를 빠져나와 다리를 불사르고 돌아왔다.

흠종이 듣고는 직접 한세충을 불러 편전에서 의견을 물었는데

흠종은 양방평이 법을 어겼는지에 대해서 물어보았고 한세충은 조목조목 아뢰었다.

무절대부(정7품 무관)로 옮겼다.

이때 승첩군 장사전이 패하자 선무부사 이미대가 장사전을 참하였는데

대교 이복고가 무리를 이끌고 난을 일으켰고 

치주와 청주에서 합세하는 자가 수만 명이나 되니 산동이 거듭 시끄러웠다.

이미대가 격서를 보내니 한세충이 소속 부대를 이끌고 추격하였는데

임치하에 이르러 병력이 1천이 넘지 못하였으나 4대로 나누고

마름쇠를 넓게 깔아 돌아갈 길을 스스로 막고는 영을 내려 말하길

   <전진하면 곧 이길 것이고 물러나면 곧 죽을 것이니

    달아나는 자의 목숨은 후방의 부대가 죽여라!>

이에 감히 뒤를 돌아보는 자가 없었고 모두 죽기를 각오하고 싸워

반란군을 대파하였고 거듭 이복고를 참하니 남은 적들이 모두 흩어져 도망갔다.

승세를 타고 적을 추격하여 숙천에 이르렀는데 반란군이 아직도 만 명이나 되었다.

반란군은 여자들을 끼고 소를 잡아 마구 술을 마시고 있었다.

한세충이 야밤에 단기로 반란군의 진영으로 가서 호통치며 말하길

   <대군이 이르렀도다!

    빨리 창을 묶고 갑옷을 말고 투항한다면 내가 능히 너희를 온전히 보호할 것이고

    너희와 함께 공명을 세울 것이노라!>

적이 놀라 공경하게 목숨을 청하며 모두 꿇어앉아 술과 고기를 바쳤다.

한세충이 말에서 내려 안장을 풀고 남김없이 마시고 씹어 먹으니 이에 반란군이 모두 투항하였다.

날이 밝은 무렵에 한세충의 군이 아직 이르지 못한 것을 보고는

비로소 안색이 변하여 크게 후회하였다.

공으로써 좌무대부(정6품 무관)와 과주단련사(종5품)로 옮겼다.

조서를 내려 조정으로 들어오게 하였고 정임관(실직)으로 단주단련사(종5품)에 제수하고는 호타하에 주둔하게 하였다.



6. 적장의 목을 빌린 돈 받아오듯 하다!


1126년 9월 진정이 함락되었는데 한세충은 왕연이 조주를 지키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빠르게 조주로 향하였다.

금나라 군이 이르러 더욱 급하게 공격하니 조주성의 군량이 떨어지고 원군도 차단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 포위를 뚫고 달아나자고 한세충에게 권하였느나 듣지 않았다.

때마침 폭설이 내렸는데 야밤에 죽기를 각오한 병사 3백 명을 인솔하여 적의 진영을 공격하니

적이 크게 놀라 혼란에 빠져 자기들끼리 서로 공격하였다.

아침에 이르러 금나라 군이 모두 달아났다.

후에 금나라에서 온 자가 있었는데 비로소 그 당시에 금의 대추장이 창상을 입어 죽게 되었고

이런 연고로 무리가 버티지 못하였던 것이었다.

가주방어사(종5품)로 옮겼다.

대명부로 돌아오니 조야벽이 한세충을 전군통제로 삼았다.

이때 강왕이 제주에 이르렀는데 한세충이 소속 부대를 거느리고 제위에 오르길 청하였다.

금나라 군이 군을 풀어 성을 핍박하니 인심이 흉흉하였는데

한세충이 서왕태에 근거하여 힘껏 싸우니 금나라 군이 조금 물러났다.

다음 날에 금의 추장이 수만 명을 인솔하여 이르렀는데

이때 한세충의 휘하에 겨우 병력이 1천이었다.

한세충이 단기로 적진에 돌입하여 그 추장을 참하니 마침내 금나라 군이 크게 무너졌다.



7. 남송 개국! 반란군을 싹쓸이하다!


강왕이 제위에 즉위하자 광주관찰사(정5품)와 대어기계(황제 친위 무관)를 제수하였다.

한세충이 장안으로 천도하길 청하였는데 때마침 군이 양하를 확보하자

이때 조정의 논의가 한세충의 의견을 따르지 않았다.

처음으로 친위군을 만들었는데 한세충을 좌군통제로 삼았다.

이해에 명을 내려 왕연과 장준은 진주의 반란군을 토벌하게 하였고

유광세는 여역의 반란병을 토벌하게 하였고

교중복은 경동의 반란군 이욱을 토벌하게 하였고

한세충은 단주의 반란군 어태를 토벌하게 하였다.

얼마 안있어 한세충이 어태를 격파하고는 여역으로 가 반란군을 공격하여 격파하여 모두 참하여 바쳤다.

이에 도적 무리가 남김없이 평정되었으며 조정에 들어와 황제를 숙직하며 호위하였다.

그리고 하북의 반란군 정순과 양진 등이 모두 초무사에게 이르러 투항하니 종택이 거둬 등용하였다.

1128년에 정국군 승선사에 올랐다.

황제가 양주로 가자 한세충이 소속 부대를 이끌고 따라갔다.

이때 장우가 금산에서부터 투항하였는데 성 아래를 막고 갑옷을 풀지 않으니 인심이 매우 두려워하였다.

한세충이 그 보루로 홀로 들어가 반역과 순종을 타이르니 무리가 모두 명에 순종하였다.

이민의 무리 10만 역시 항복하여 나란히 이르렀는데 다시 반란을 일으킬 정황이 있었다.

왕연이 한세충을 보내 투항을 권고하였는데 한세충의 그 무리 유언에게 다른 뜻이 있음을 알고는

즉각 유언을 먼저 참하였고 이민과 장교 29명을 포박하여 나오니 마침내 왕연이 참하였다.

일이 끝나자 경서 등의 지역으로 보내 내외의 도적을 잡아 죽이게 하였다.



8. 남자가 화살쯤은 많이 맞아봐야 한다!


금나라 군이 재차 하남을 공격하였는데 적진(翟進)이 한세충의 군대와 합세하여 오실의 영을 야습하였으나

반격을 받아 패전하였다.

때마침 정진이 기한을 넘기니 진사공이 먼저 달아났고 한세충은 몸에 가시나무와 같이 화살을 맞았으나

힘껏 싸워 탈출하였다.

개봉으로 돌아와 먼저 퇴각한 한 부대를 꾸짖고는 모두 참하니 좌우가 두려워하였다.

정진이 이런 이유로 한세충과 더불어 틈이 벌어졌고 난을 일으켜 한세충을 죽이려 하였다.

조정에서 한세충을 소환하여 부연로 부총관을 제수하였고 평구좌 장군을 더하고는 회양에 주둔하여

산동의 병력으로 적을 막게 하였다.

점한(종한)이 한세충이 회양을 움켜쥐고 있다는 것을 듣고는 곧 병력 1만 명을 나눠

양주로 빠르게 달려가 스스로 대군을 이끌고 한세충과 맞써 싸우고자 하였다.

한세충이 대적하지 못하고 야밤에 회군하였고 적이 뒤쫓으니 군이 목양에서 궤멸하였고

합문선찬사인 장우가 전사하였다.



9. 끝없는 파천! 그리고 묘부 쿠데타!


1129년에 황제가 여러 장수를 소환하여 파천을 의논하니 장준(무관)과 신기종은 호남으로 가길 청하였는데,

한세충이 말하길

   <회와 절은 부유하고 지금의 근본의 땅인데 어찌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가겠습니까?

    인심이 의심을 품으니 한번 물러남이 있으면 곧 원망을 품은 자들이 난을 생각할 것이고

    중호와 민령은 아득히 먼데 도로의 안위가 변함이 없겠습니까?

    회와 강은 마땅히 남은 병사로 수비하고 어가는 마땅히 병력을 나눠 호위하고

    10만 명을 갖춰 반으로 나눠 강과 회의 위아래로 호종하고

    남은 5만으로 금나라 군을 저지한다면 가히 보존하여 막아서 지킴에 근심이 없지 않겠습니까?>

양성에 있는 흩어져 도망간 자들을 거두어 합하여 수천 명을 얻었는데 황제가 전당에 이르렀다는 것을 듣고는

즉시 바닷길을 통하여 행재(임금이 있는 곳)에 다다랐다.

묘부와 유정언이 반란을 일으키자 장준(문관) 등이 평강에 있으면서 난의 토벌을 의논하였는데

한세충이 이르렀다는 것을 알고는 다시 서로 기뻐하며 위로하였고 장준(무관)은 기뻐하고 뛰면서 기쁨을 감추지 못하였다.

한세충이 장준(무관)의 서신을 받자 크게 서러워하고는 술을 들어 신령에 제사하며 말하길

   <맹세컨대 이 도적과는 더불어 함께 하늘을 머리에 이지 않겠다!>

사졸이 모두 분발하였다.

장준(문관)을 만나 말하길

   <금일의 대사는 세충이 장준(무관)과 더불어 몸을 맡기길 원하오니 공은 근심하지 마십시오!>

즉각 진군하고자 하였다.

장준(문관)이 말하길

「간신을 제거하려다 임금이 해를 당할까 두려우니 일을 급하게 하는 것은 불가하며

  급하면 곧 헤아릴 수 없는 일이 있을까 두렵소.

  이미 풍번을 보내 달콤한 말로 적을 안심시켰소>

1129년 3월 20일에 소속 부대를 이끌고 평강을 출발했다.

장준(무관)이 한세충의 병력이 적음을 고려하여 유보의 병력 2천을 빌려주게 하였다.

배에 갑병을 태우고 가니 30리를 잇닿았다.

수주에 이르러 칭병하고 가지 않고는 사다리를 만들고 기계를 고치니 묘부 등이 비로소 두려워하였다.

처음에 묘부와 유정언이 한세충이 온다는 것을 듣고는 공문을 보내 그 군대를 강음에 주둔하라 하였다.

한세충이 좋은 말로 대답하고는 또한 소속 부대가 모자라 행재(임금이 있는 곳)에 다다르고자 한다 말하였는데

묘부 등이 크게 기뻐하고는 허락하였다.

한세충과 더불어 장준(무관)을 절도사에 제수한다는 가짜 교지가 이르렀으나 모두 받지 않았다.

이때 한세충의 처 양씨와 더불어 아들 한량이 묘부의 인질이 되었는데 엄하게 비밀로 하여 막아서 지켰다.

주승비가 묘부를 속여 말하길

   <지금 태후에게 아뢰어 두 사람을 보내 한세충을 회유하면 곧 평강의 여러 사람이 더욱 편안해질 것이오>

이에 양씨를 불러 들여 안국부인에 봉하고 한세충을 영접하게 하여 임금(새 황제 조부)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하였다.

양씨가 성을 나가 빨리 달려 하룻 밤에 수주에서 한세충과 만났다.



10. 한...한세충이 온다!


오래지 않아 명수(묘부와 유정언이 황태자 조부를 옹립하고 반포한 연호)의 조서가 이르자 한세충이 말하길

   <나는 건염(고종의 연호)이 있음은 알고 있으나 명수가 있음은 알지 못한다.>

그 사신을 참하고 조서를 취하여 불살랐고 진군을 더욱 급하게 하였다.

묘부 등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임평에 머물렀는데 적장 묘익과 마유길이 산을 등지고 물에 의지하여 진을 치고는 

중류에 녹각(짧은 나무토막으로 만든 대적 장애물)을 세우고 배의 운항을 막았다.

한세충이 배를 버리고 힘껏 싸웠고 장준(무관)이 뒤를 이었고 유광세 또한 뒤를 이었다.

군이 조금 물러나자 한세충이 거듭 말을 버리고 창을 손에 쥐고 앞장서며 영을 내려 장졸에게 말하길

   <금일 마땅히 죽음으로써 보국(나라의 은혜를 갚음)한다.

    겉에 여러 발의 화살을 맞지 않은 자는 모두 참할 것이다.>

이에 병사가 모두 명령에 복종하였다.

적이 신비노를 벌려놓고 활시위를 한껏 당기고 대기하였는데 한세충이 두 눈을 부릅뜨고 크게 소리치며

칼을 빼어들고 앞장서 돌격하자 적이 기세에 눌려 뒷걸음질을 쳤고 화살을 쏘지 못하게 되어 마침내 패하였다.

묘부와 유정언이 정병 2천을 끼고 용금문을 열고 이로써 달아났다.

한세충이 질주하여 들어가니 황제가 걸어와 궁문에 이르러 한세충의 손을 쥐고 통곡하며 말하길

   <중군 오담이 반란군을 도왔고 또한 짐의 팔꿈치와 겨드랑이를 붙잡았으니 먼저 주살할 수 있겠소?>

한세충이 즉각 오담을 만나 보고 손을 잡고 더불어 이야기하다 그 중지를 꺾었고 저자에서 죽였다.

또 도적의 주동자 왕세수를 붙잡아 해당 관리에게 넘겼다.

조서를 내려 무승군 절도사와 어영좌군도통제를 제수하였다.

황제에게 청하여 말하길

   <도적이 정병을 끼고 있고 구와 민의 거리가 심히 가까우니 만약 소굴을 이룬다면 

    모두 멸할 수가 없으니 신이 토벌함을 청하나이다.>

이에 강, 절의 제치사로 삼아 구와 신으로부터 추격하여 어량역에 이르러 도적과 더불어 조우하였다.

한세충이 걸어 나가 창을 빼어들고 앞장서자 도적이 멀리서 바라보더니 떠들며 말하길

   <이는 한장군이다!>

모두 놀라 흩어졌다.

유정언과 더불어 묘부의 동생 묘익을 사로잡아 행재(임금이 있는 곳)로 보냈고,

묘부가 건양으로 도망가자 추격하여 사로잡고는 모두 처형하였다.

한세충이 처음에 묘부 토벌을 하기 전에 고종에게 하직 인사를 하며 말하길

   <신이 맹세컨대 도적을 생포하여 사직을 위해 치욕을 씻고

    전각 앞에 두 성난 호랑이를 사로잡아 내헌(임금께 바침)하겠나이다.>

이에 이르러 마침내 그 말과 같게 되었다.

황제가 [충용(忠勇)]이라는 두 글자를 친필로 써서 기의 표지로 하사하였다.

검교소보와 무승소경군 절도사를 제수하였다.



12. 8천vs10만 황천탕 패전, 그러나 중흥의 계기


금 태조 아골타의 4남인 올출(완안종필)이 장차 침략하려 하자

황제가 제장들을 불러 파천의 땅을 물었는데 장준(무관)과 신기종은 악(鄂)과 악(岳)으로부터 장사로의 행차를 권하니

한세충이 말하기를,

   <국가가 이미 하북과 산동을 잃었는데 만약 또 강(江)과 회(淮)를 버리면 다시 어떤 땅이 있겠습니까?>

이에 한세충을 절서 제치사로 삼아 진강을 지키게 하였다.

이윽고 올출이 길을 나눠 도강하니 둔을 친 각군이 모두 패하였고 한세충 역시 진강에서 강음으로 퇴각하였다.

두충이 건강(현 남경)을 들어 적에게 투항하였고, 올출이 광덕에서 임안(항주)까지 깨트리자 황제가 절동으로 갔다.

한세충이 전군(前軍)으로써 청룡진에 주둔하고 중군은 강만에 주둔하였으며 

후군은 해구에 주둔하여 적이 돌아 오길 기다려 요격하려 하였다.

황제가 불러 행재에 이르니 아뢰기를

   <바야흐로 강 상류에 머무르며 금나라 군의 회군을 끊고 죽을힘을 다해 일전하겠나이다!>

황제가 재상들에게 이르러 말하길

   <이는 여이호가 회계에 있으면서 일찍이 이 책략을 세웠었는데 한세충은 여이호와 의논하지 않고도 의견이 서로 같구나!>

친서를 주어 그 상류에 머무름을 허락하였다.

때마침 상원절(정월 대보름)이었는데 수주로 나아가 장등고와 회합하였고 홀연히 병력을 인솔하여 진강으로 달려갔다.

급기야 금나라 군이 이르렀는데 곧 한세충의 군이 이미 초산사에 먼저 둔을 쳤다.

금의 장수 이선이 항복하니 받아들였다.

올출이 사신을 보내 통문하고 기일을 약조하여 대전하고자 하니 허락하였다.

십여 차례 서로 싸웠는데 양부인(한세충의 부인 양홍옥梁紅玉, 실명은 야사)이 군용 북채와 북을 손수 잡았고

금나라 군이 끝내 강을 건널 수 없었다.

약탈한 것을 모두 돌려주고 길을 빌린다 하니 들어주지 않았다.

명마를 헌납하며 길을 터주길 청하였는데 역시 들어주지 않았다.

달랄이 유주에 있었는데 패근 태일을 보내 회동으로 달려가 올출을 구원하게 하였는데

한세충이 두 추장과 더불어 황천탕에서 48일을 서로 대치하였다.

태일 패근의 군이 강 북쪽에 있었고 올출의 군은 강 남쪽에 있었으며

한세충이 군선으로 박금산 아래로 나아갔는데 미리 쇠밧줄로 큰 갈고리를 날래고 건강한 자들로 하여금 당기게 하였다.

다음날 아침에 적의 배가 떠들썩하게 전진하자 한세충이 군선을 나눠 두 길로 그 배후로 나갔으며

매번 하나의 밧줄을 매달면 곧 금의 배를 끌어당겨 침몰시켰다.

올출이 궁하고 긴박하여 만나서 대화하자 심히 애걸하며 청하였다.

한세충이 말하길

   <우리의 두 임금(휘종과 흠종)을 돌려주고 우리의 강토를 회복한다면 곧 서로 온전함이 가능하다>

올출이 말이 궁하여 답변할 말이 없었다.

또 수일 동안 다시 만남을 구하였는데 말이 공손하지 않자 한세충이 활을 당겨 쏘려고 하니

빠르게 활시위를 벗기고 가버렸고 제장에게 이르러 말하길

   <남군이 배를 부리는 것이 말을 부리는 것과 같은데 어찌하는가?>

사람을 모집하여 바다배(몽동대함)를 깨트릴 책략를 올리게 하니

오랑캐 왕모(王某)라는 자가 그 배 가운데 흙을 실고 평판을 늘어놓게 하며

배의 판자에 구멍을 뚫어 노로써 바람이 그치면 곧 강을 나가고 바람이 있으면 곧 나가지 말라 하였다.

바다배는 바람이 없으면 움직일 수 없다 하였다.

또 모책을 바치는 자가 있어 말하길

   <큰 개천을 파 강 입구에 접하면 곧 한세충의 상류에 있게 된다>

올출이 하룻저녁에 은밀히 개천 30리를 팠고 또 방술사의 계책을 채용하여 

백마를 죽이고 부녀자의 심장을 도려냈고, 올출 스스로 그 이마를 베어 하늘에 제사하였다.

다음날에 바람이 그치자 아군의 돛이 약하여 움직일수 없게 되니 금나라 군이 작은 배로 불을 질렀고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손세순과 엄윤이 모두 전사하였고 적이 절강을 얻고는 달아나 가버렸다.

한세충이 남은 군사을 거둬 진강으로 귀환하였다.

처음에 한세충이 이르길 적이 이르러 필히 금산묘을 올라 아군의 허실을 관찰할 것이다! 하며

곧 병력 100인을 보내 묘 가운데 매복하게 하고 또 100명을 강 언덕에 매복하게 하여 북소리로 알리기로 약조하여

언덕의 병력이 먼저 들어가고 묘의 병력과 함께 공격하게 하였다.

금나라 군 5기가 과연 들어가서 엿보니 묘안의 군사들이 기뻐하였고 먼저 북을 치고 나가서 그중 2명을 사로잡았다.

3명은 달아났는데 그중에 붉은빛의 예복과 옥대를 찬 자가 있었는데 이윽고 말에서 떨어졌다가 

다시 말을 달려 달아나는 자가 있었고 사로잡은 자를 힐문하니 곧 올출이라 하였다.

이 전역에서 올출의 병력이 10만이라 불렸으며 한세충은 겨우 8천이었다.

황제가 무릇 6번 공을 기록하고 포상하였으며 칭찬하고 장려하여 심히 총애하였다.

검교소보와 무성감덕군 절도사 및 신무좌군도통제를 제수하였다.



13. 남부의 반란군을 평정하다!


건안의 범여위가 배반하였는데 신기종 등이 토벌하려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반란군의 세력이 더욱 성해졌다.

한세충을 복건, 강서, 형호 선무부사로 삼았는데 한세충이 말하길

   <건주(建)는 민령의 상류에 자리 잡아 있으니 적이 물을 따라 내려온다면 7군(郡)이 모두 혈육이 될 것입니다!>

빠르게 보졸 3만을 거느리고 수륙으로 병진하였다.

검담에 주둔하였는데 적이 다리를 불살랐고 한세충이 말을 채찍질하여 강을 먼저 건너자 마침내 군대가 모두 건넜다.

반란군이 모든 보루와 중요 길목을 점거하고 관군을 막았는데

한세충이 명하여 여러 군은 깃발을 내리고 북을 숨기게 하고는 곧바로 봉황산에 이르러 

잠복하여 성읍을 내려 보고는 공성용 사다리와 화루(공성용 무기)를 준비하였고 

밤낮으로 연이어 나란히 공격하니 적이 두려워서 떨었다.

5일 만에 성을 깨트렸는데 범여위는 분신하여 죽었고 그 동생 범악과 범길은 참하여 군령을 내려

그 주동자 사향, 시규와 더불어 비장 육필강 등 500여 인을 사로잡았다.

한세충이 처음에 건주의 백성을 모조리 주살하고자 하였는데 이강이 복주로부터 말을 달려와서 한세충을 보고 말하길

   <건주의 백성 다수는 죄가 없다!>

한세충이 군사들로 하여금 성위에 올라가게 하여 내려오지 말라 하였고

백성이 성을 떠나는 것을 허용하였고 농민에게는 소와 곡식을 공급하였고

상인은 제멋대로 가격을 올리는 것을 금하게 하였으며

반란군의 위협에 눌려 복종한 자들은 걸러서 보내주었고

오직 적에게 붙어 따른 자들만을 취하여 주살하였다.

백성이 죽을 지경에서 다시 살아난 것을 감격하여 집마다 한세충의 사당을 세웠다.

승첩을 보고하자 황제가 말하길

   <아무리 옛 명장이라 하여도 어찌 이보다 더하겠는가?>

황금과 그릇붙이를 하사하였다.

한세충이 강서와 호남의 도둑과 반란군이 더욱 많다고 아뢰며 승기를 타 모두 토벌하여 평정하기를 청했다.

광서의 반란군 조성이 남은 무리를 끼고 침주과 소주에 있었다.

한세충이 이윽고 민의 도적을 평정하고 영가로 군을 돌리면서 장차 휴식하는 것처럼 보이게 하였다.

그러다 홀연히 처주와 신주를 경유하여 지름길로 예장에 이르렀고

물가 수십 리에 잇닿아 영을 세우니 그 반란군은 한세충의 군이 온 것을 알지 못하다가 크게 놀라게 되었다.

한세충이 사람을 보내 반란군을 초유하니 조성이 그 무리를 들어 항복하였고

이에 전사 8만을 얻어 행재(임금이 있는 곳)에 보내 이르게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장사로 군대를 옮겼다.

이때 유충에게 무리 수만이 있었는데 백면산에 근거하였고 영책이 서로 마주 바라보았다.

한세충이 비로소 이르자 급히 공격하고자 하였는데 선무사 맹유가 불가하다 하니

한세충이 말하길

   <병가의 이로움과 해로움은 책략을 써서 살필 뿐인데 참정은 알지 못하오!

    청컨대 보름을 기약하여 승전을 보이도록 하겠소!>

마침내 적과 더불어 보루를 구축하고 상대하였고 바둑과 장기를 두며 휘장을 둘러치고 술을 마셨다.

성벽을 견고히 지키고 움직이지 않으니 무리가 헤아리지 못하였다.

어느 날 저녁에 소격과 함께 말을 나란히 타고 가서 적의 영을 뚫고 들어갔는데

정탐병이 힐문하여 물으니 한세충이 먼저 적의 군호를 얻은 관계로

곧바로 소리 내어 응답하였고 반란군의 진영을 두루 돌아다니며 보고는 나왔다.

한세충이 기뻐하며 말하길

   <이는 하늘이 내려 준 것이다!>

야밤에 정병 2천을 백면산에 매복하고 여러 장수와 더불어 영을 철거하고는 진군하였고

반란군이 바야흐로 맞아 싸웠는데 한세충이 보낸 병력이 이미 적의 중군으로 빠르게 들어가서

망루를 탈취하고 기와 일산을 세우며 우레와 같이 전하여 부르니 적이 돌아다보고는 크게 놀라 흩어졌다.

한세충이 장졸들을 지휘하여 협공하여 대파하였고 유충의 목을 참하니 호남이 마침내 평정되었다.

태위를 제수하였고 대와 홀을 하사하였으며 거듭 공으로써 추밀의 칙서를 내려 내외의 제장들에게 널리 알리게 하였다.

건강으로 회군하여 배외군을 설치하였는데 모두 용감하고 굳세며 절륜한 자들이었다.

9월에 강남 동로와 서로 선무사로 삼고 건강에 관부를 설치하게 하였다.



14. 주상의 근심을 신이 씻어 내겠나이다!


1133년 3월에 개부의동삼사로 진급하였고 회남 동로, 서로 선무사로 충원되었으며, 사주에 관청을 설치하였다.

이때 반란군 이횡이 진군하여 조정과 연합하여 금의 괴뢰국 제나라를 토벌한다는 것을 듣고는

보낼 대장을 의논하였는데 한세충이 충용하다 하여 이런 연고로 한세충을 보냈다.

거듭 광주의 명마 7마리, 갑옷 1천 벌, 은 2만 냥, 비단 2만 필을 하사하였다.

또 100만 민, 쌀 28만 곡을 내어 반년치 용품으로 내려주었다.

명을 내려 호부시랑 요순명은 사주에 이르러 돈과 곡식을 총괄하게 하였다.

창부낭관 손일이 평강부와 상수의 요주에 가서 군량 모집을 독려하였다.

이횡의 군대가 패하여 진으로 돌아가자 한세충이 마침내 회를 건너지 못하였다.

1134년에 건강, 진강, 회동 선무사로 삼아 진강에 주둔하게 하였다.

이해에 금나라 군이 유예와 합병하여 길을 나눠 침략하여 들어왔다.

황제가 친서를 써서 한세충에게 수비를 단단히 경계하라 명하였고

군을 이끌고 나아가 취할 것을 도모하게 하였는데 조서의 말씀이 간절하였다.

한세충이 조서를 받들자 감격하여 울며 말하길

   <주상의 근심이 이와 같으니 신하가 어찌 살겠느냐?>

마침내 진강으로부터 군대가 건넜는데 통제 해원을 시켜 고우를 지키게 하고는 금의 보졸을 망보게 하였다.

친히 기병을 이끌고 대의에 주둔하였고 적의 기병을 방어하기 위해 나무를 베어 책을 만들고 퇴로를 스스로 끊어 버렸다.

때마침 위량신을 금에 사신으로 보냈는데 한세충이 취사도구를 치우고

둔을 옮겨서 강을 지키라는 조서가 있는 것처럼 위량신을 속였다.

위량신이 급히 금나라로 가자 한세충이 위량신이 이미 국경을 나갔을 것이라 헤아리고

말에 올라타 군중에 영을 내려 말하길

   <내 채찍이 향하는 곳을 보라!>

이에 군을 이끌고 대의에 머물면서 5진을 정돈하였고 20여 곳에 복병을 설치하여 북소리를 들으면 곧 일어나 공격하기로 약조하였다.

위량신이 금의 군중에 이르자 금나라 사람이 왕사(임금의 군대, 남송군)의 움직임과 휴식을 물었고

위량신이 일일이 본 바대로 대답하였다.

금나라 섭아 패근이 한세충이 퇴각한다는 것을 듣고는 심히 기뻐하였고

병을 이끌고 강구에 이르렀는데 대의와의 거리가 5리였다.

별장 달패야가 철기를 끼고 5진의 동쪽을 지나갔다.

한세충이 작은 깃발을 전하여 북을 쳐서 울리니 복병이 사방에서 일어났고

깃발의 색이 금나라 군의 기와 함게 뒤섞여 나타나니 금군이 혼란에 빠졌으며 아군이 번갈아 나아갔다.

배외군이 각각 장부(긴 도끼)를 손에 쥐고 위로는 금군의 가슴을 찌르고 아래로는 말 다리를 베었다.

적이 갑옷을 입었는데 진창에 빠졌고 한세충이 강한 기병을 지휘하여 사면을 유린하니

금나라 군의 인마가 모두 넘어져 죽었고, 마침내 달패야 등 200여 명을 생포했다.

한세충이 보낸 동민 역시 금나라 군을 천장현의 아구에서 공격하여 여진족 40여인을 생포하였다.

해원은 고우에 이르러 적과 조우하니 수군은 하천을 끼고 진을 설치하여 하루에 13번 합전하였는데

서로 대치하여 승패가 결정되지 못하였다.

한세충이 성민을 보내 기병을 거느리고 구원하여 가게 하여 거듭 크게 싸웠는데 천호 여진급 등을 생포하였다.

한세충이 거듭 친히 추격하여 회에 이르자 금나라 군이 놀라 흩어졌고 서로 짓밝고 익사한 자가 심히 많았다.

승첩을 보고하자 뭇 신하가 조정에 들어와 하례하였는데 황제가 말하길

   <한세충은 충용하니 짐은 그가 필히 성공할 것임을 알고 있었노라!>

심여구가 말하길

   <건염(남송 1대 황제 고종의 #1연호) 이래로부터 장졸들이 금나라 군과 더불어 대등하게 맞아 싸워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는데

    지금 한세충이 연승하여 그 칼날을 이로써 꺾었으니 그 공이 적지 아니 하나이다.>

황제가 말하길

   <고생한 차례대로 포상하라!>

이에 부장 동민, 진각, 해원, 호연통 등을 모두 차등 있게 높이 발탁하였다.

논자들은 이 거사를 중흥(국운이 다시 일어남)의 무공(武功) 제일(第一)로 삼았다.



15. 괴뢰국 군대를 종횡무진 휩쓸다!


이때 달랄(완안창)이 사주에 주둔하였고 올출(완안종필)은 죽숙진에 주둔하였는데 한세충이 길목을 움켜쥐고 있으니

서신과 예물로써 싸우기로 약조하니 한세충이 허락하였고

또 두 명의 악공과 광대로 하여금 귤과 찻잎을 보내 답례로 방문하게 하였다.

때마침 눈과 비가 왔는데 금나라 군의 식량 보급로가 통하지 않았다.

들판에는 약탈할 것이 없으니 말을 죽여 먹었고 금나라 군의 번한군(한족군대)이 모두 원망하였다.

올출이 야밤에 군을 이끌고 돌아가니, 유린과 유예는 치중을 버리고 달아났다.

1135년에 소보로 진급하였다.

1136년에 무녕안화군 절도사와 경동회동로 선무처치사를 제수하였고 초주에 관청을 설치하였다.

한세충이 풀이 무성한 황무지를 개척하여 군부를 세웠고 사졸과 더불어 동일하게 힘껏 일하였다.

부인 양씨는 친히 대나무를 짜서 덮개로 하였다.

장졸로 싸움을 겁내는 자가 있으면 한세충은 건괵(여성의 머리 장식)을 쓰게 하고

음악을 켜고 큰 잔치를 열어 부인으로 단장하게 하여 이로써 부끄럽게 하였는데

이런 연고로 사람마다 분발하였다.

흩어진 백성을 어루만져 모았고 상공업자에게 혜택을 주니 산양이 마침내 귀중한 진이 되었다.

유예의 군대가 수차례 들어와 노략질하였는데 번번이 한세충이 깨트렸다.

이때 장준(문관)이 우상으로써 군대를 사열하였는데 한세충에게 명하여 승과 초로부터 회양을 도모하게 하였다.

유예가 바야흐로 회양에 병력을 모았는데 한세충이 즉각 군을 이끌고 회를 건너 부리로 달려가 북진하여 그 성 아래에 이르렀다.

유예의 군대가 포위하자 창을 흔들고 한번 질주하여 포위를 무너뜨리고 나갔는데 하나의 화살촉도 맞지 않았다.

호연통이 금나라 장수 아합 패근과 더불어 격전하였는데 그 목을 움켜쥐고 사로잡으니

예리한 기세를 타고 기습하였고 금나라 군이 패주하였다.

이윽고 회양을 포위하였는데 적이 견고히 지키고 내려오지 않으니

한세충이 약조하여 말하길

   <하루 동안 포위를 당하면 적이 봉화 하나를 일으킬 것이다>

이에 이르러 6개의 봉화를 모두 일으키니 올출이 유예와 함께 모두 이르렀다.

한세충이 장준(무관)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는데 장준(무관)은 한세충에게 감추는 뜻이 있다고 보고는 따르지 않았다.

한세충이 진을 정돈하고 대적하여 나아가 사람을 보내 알려 말하길

   <비단옷과 총마(옥색 털빛의 말)를 타고 진 앞에 서있는 자가 바로 한상공이다! 라고 하라!>

혹자가 위험하다 하니 한세충이 말하길

   <이렇게 하지 않으면 적을 오게 하는데 부족할 것이다>

적이 과연 이르렀고 그 전쟁을 인도한 장수 2명을 죽이니 마침내 적이 군을 이끌고 가버렸다.

잇달아 조서를 내려 회군하도록 하니 한세충은 다시 초주로 돌아왔고

회양의 백성으로 따라와 의탁하는 자가 만을 헤아렸다.



16. 좌절된 북벌!


1136년 3월에 경동과 회동 선무처치사 겸 절제 진강부를 제수하였고 거듭 초주에 관청을 설치하였다.

1136년 4월에「양무익운공신(揚武翊運功臣)」이라 호칭을 하사하였고 횡해와 무녕 및 안화 3진 절도사를 더하였다.

1136년 9월에 황제가 평강에 있었는데 한세충이 초주로부터 와서 알현하였다.

1136년 10월에 변경에서 급보가 왔는데 유광세는 여주를 버리고 태평으로 귀환하고자 하였고 

장준(무관) 역시 병력의 증강을 청하였다.

도독 장준(문관)이 말하길

   <금일의 일은 진격만 있고 퇴보는 없다!>

이에 한세충이 병력을 이끌고 회를 건너 금의 장수 와리야와 더불어 힘껏 싸웠다.

괴뢰국 제나라 황제 유예가 장차 회동을 노략질하고자 하였는데 한세충의 병이 요지를 움켜쥐고 있자 더는 진군하지 못하였다.

1137년에 고우성을 축성하였고 백성이 더욱 편안해졌다.

처음에 한세충이 군을 옮겨 산양에 주둔하였는데 몰래 사람을 보내 산동의 호걸과 결탁하였고 

완급을 조절하여 내응의 약조를 얻어냈고 숙주 마진과 더불어 태행의 도적떼 또한 돕기를 원하고 약속하는 자가 많았다.

금인이 유예를 폐하자 중원이 진동하였는데 한세충이 이 기회를 잃는 것은 불가하다 일컫고는

전군이 북벌하여 토벌할 것을 조정에 청하였고 호걸을 불러 귀부시켜 중원을 회복할 계책을 갖추었다.

때마침 진회가 화의를 주장하였는데 명하여 한세충은 군영을 옮겨 진강에 주둔하게 하였다.

한세충이 아뢰길

   <금나라 사람은 간사하고 잘 속이니 계략으로 아군의 진군을 늦출까 두렵사옵니다.

    바라건대 저의 군을 남겨 강과 회를 가로막게 하소서!>

또 화의의 옳지 않음를 힘껏 주장하였는데 절개를 위하여 죽는 것을 본받길 원하였고

앞장서서 적과 대적하여 만약 승리하지 못한다면 그때 화의를 따른다 해도 늦지 않는다 하였다.

또 말하길 왕륜과 남공좌가 하남의 경계에서 함께 하였으니 

영을 내려 공문서를 명백히 갖춰 뒷날의 증거로 삼아 반복함이 없게 해달라 애걸하였다.

상소를 십수 차례 올렸는데 모두 강개(불의에 대하여 의기가 복받쳐 원통하고 슬픔)하고 

격절(말이 격렬하고 절실함)하였고 또 단기로 궐에 이르러 면주(임금을 뵙고 말씀을 아룀)를 청하였는데

황제가 이르러 두터운 은혜로써 칭찬하여 회답하였다.

후에 금이 과연 맹약을 저버렸는데 모두 한세충의 그 말과 같았다.

금의 사신 소철지가 오니 황제가 조서로써 화의의 문서에 서명하였는데,

한세충이 듣고는 무릇 4번 상소를 올려 아뢰길

   <화의를 허락함은 불가하오니 거병하여 결전을 원하나이다!

    군대의 기세가 가장 중요한 부분이오니 신이 담당하길 청하나이다!>

또 아뢰길

   <금나라 사람이 유예를 재상으로 대우하고자 하고,

    나라의 사대부가 모두 제후의 신하가 되니 들고일어날 것이고, 

    백성의 인심이 흩어질까 두렵고 군사의 사기가 시들고 꺾일 것이나이다.>

또 역참으로 달려가 대면하여 아뢰기를 청하였는데 불허하였다.

이윽고 홍택진에 매복하여 장차 금나라의 사신을 살해하고자 하였는데 할 수 없었다.



17. 10년간 국경을 굳건히 지키다!


1139년에 소사를 제수하였다.

1140년에 금나라가 맹약을 깨트리고 올출(완안종필)이 살리갈과 이성 등을 인솔하여 삼경(三京)을 격파하였고 

길을 나눠 깊게 들어왔다.

8월에 한세충이 회양을 포위하였고 금나라 군이 구원하여 왔는데 한세충이 가구진에서 요격하여 깨트렸다.

또 해원을 보내 담성에서 금나라 군을 공격하였고, 유보는 천추호에서 공격하였는데 모두 승전하였다.

측근 장수 성민은 통제 허세안을 따라 회양문을 탈취하여 들어갔는데 문안에서 크게 싸웠다.

허세안은 화살 4대가 명중하였고 성민은 30여 상처를 입었는데 거듭 문을 빼앗아 나갔다.

한세충이 그 공을 아뢰어 무덕대부로 발탁하였고 성민은 이런 연유로 이름이 알려졌다.

한세충은 태보로 진급하였고 영국공에 봉하였으며 하남과 하북의 여러 지역 초토사를 겸하였다.

1141년에 올출이 순창의 패배를 치욕으로 여겨 거듭 재침을 도모하였는데 

조서를 내려 회서에 크게 합병하여 이로써 대비하게 하였다.

얼마 안 있어 금나라 군이 자고에서 패하였는데, 거듭 호주를 포위하였다.

한세충이 호주를 구원하라는 조서를 받자 군선을 타고 초신현에 이르렀는데 

야밤에 기병으로써 문현역에서 금나라 군을 공격하여 깨트렸다.

금나라 군이 호주를 공격한지 5일 만에 함락하였다.

3일째 포위공격을 하던 날에 한세충이 이르렀는데 양기중의 군은 이미 남쪽으로 달아났다.

한세충이 금나라 군과 더불어 회안에서 싸웠는데 야밤에 유보를 보내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게 하여 장차 위협하고자 하였는데

금나라 군이 나무를 베어 적용의 물줄기를 막아 그 귀로를 움켜쥐니 한세충이 알아채고는 전군이 귀환하였다.

금나라 군이 와구로부터 회를 건너 북으로 가버렸고 이로부터는 침입할 수 없게 되었다.

한세충이 초주에 10여 년 있었는데 병력이 겨우 3만이었는데도 금나라 군이 감히 범하지 못하였다.



18. 병권 회수


진회가 삼대장 한세충, 악비, 장준(무관)의 병권을 회수하였는데

1141년 4월에 한세충을 추밀사를 임명하니 마침내 한세충이 저축해 놓은

군자금 100만 관, 쌀 90만 석, 곳간 15곳을 나라에 되돌렸다.

한세충이 이미 화의를 동의하지 않았는데 진회가 의견을 물리쳤다.

위량신이 금에 사신으로 감에 이르러 한세충이 또 힘써 말하길

   <이로부터 인심이 약해져서 국세가 의기소침할 것이니 누가 거듭 떨쳐 일어나겠나이까?

    북쪽의 사신이 오면 바라건대 저와 대면하여 의논하게 해주시옵소서!>

황제가 불허하니 마침내 항의 상소를 올려 진회가 나라를 그르친다 말하였다.

진회가 간관을 부추겨 간하게 하여 죄를 논하게 하니 황제가 그 상소를 가로막고는 비답을 내리지 않았다.

한세충이 연이어 상소를 올려 추밀의 권력을 해임해달라 청하였고 계속하여 표문을 올려 나이를 이유로 사직을 청하였다.

1141년 10월에 예천관사와 봉조청으로 삼아 파직하였고 복국공으로 올려 봉하였으며 

절월(임금이 내려주는 절과 부월)은 전과 같게 하였다.

이로부터 두문(문을 닫아걸음)하고 손님을 사절하였으며 입을 닫고 군사에 관한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때때로 나귀를 타고 술을 지니고 아이 종 한 둘이 따르면서 서호를 한가롭게 유람하면서 이로써 스스로 즐겼다.

평상시에는 이전의 보좌관만이 그 얼굴을 드물게 볼 수 있었다.



19. 진만인적 하늘로 돌아가다!


1142년에 담국공으로 고쳐 봉하였다.

현인황후(고종의 모친 위씨)가 금으로부터 귀환하였는데 한세충이 임평에 이르러 알현하였다.

후에 북방에 있을 때 그 이름을 듣고는 위문하는 자가 매우 오래되었다.

1143년에 함안군왕(咸安郡王)에 봉하였다.

1147년에 진남, 무안, 영국 절도사로 고쳤다.

1151년 8월에 훙하였는데 태사로 관직을 올렸고 통의군왕(通義郡王)에 추봉하였다.

효종조에 기왕(蘄王)을 추봉하였고 시호는 충무(忠武)였고 고종의 묘정에 배향하였다.

한세충이 처음에 병을 얻었는데 오히려 의원이 병을 치료하는 것을 꾸짖었고

무관이 침실 안으로 병문안을 하였는데 한세충이 말하길

   <나는 평민으로써 백전(百戰)하여 지위가 왕공에 이르렀고

    하늘의 신령에 의지하여 머리를 지키며 집에서 죽음을 차지하였는데

    제군(손아래 여러분)은 오히려 그 죽음을 슬퍼하는가?>

죽음에 이르러 바야흐로 조복(관복)과 초선관(담비 꼬리와 매미 날개 모양으로 장식한 관) 및 수은과 용뇌를 염하였다.

한세충은 일찍이 가족에게 경계하여 말하길

   <나의 이름은 세충(世忠)이니 너희들은 <충(忠)>자를 피휘하지 말 것이며

    만약 피휘하고 충을 말하지 않는다면 이는 충(忠)을 잊은 것이다!>

성품이 어리석을 만큼 곧았고 용감하고 충의로웠으며 일이 종묘사직과 관계가 있으면

필히 눈물을 흘리고 있는 말을 다하여 의견을 올렸다.

악비가 죄 없이 억울하게 옥에 갇히자 조정에서 감히 들고일어나 한 마디 말을 하는 자가 없었는데

한세충이 홀로 진회에게 다가가 노하여 말하였는데 이 말은 [진회 열전]에 있다.

또 화의를 저항하고 배척하였고 진회를 접촉하는 일이 또한 많았는데

혹자가 그만두도록 권하였으나 한세충이 말하길

   <지금 화를 두려워하여 구차하게 화의에 동의하여 훗날에 눈을 감는다면 

    어찌 태조전 아래에서 철장(쇠로 만든 지팡이)을 받을 수 있겠는가?>

이때 한두 명의 대장으로 진회에게 굽히고 따르며 구차하게 목숨을 보전함이 많았는데

한세충은 진회와 더불어 한 곳에서 국정을 논하면 한번 읍하고는 그 외에는 일찍이 더불어 담화하지 않았다.

의를 좋아하고 재물을 가벼이 여겼으며 하사품을 가져오면 모두 장졸에게 나눠 줬고,

사전(임금에게 하사받은 토지)에서 보내오는 조세는 편호(편성된 호구) 등에게 주었다.

병권의 행사는 엄중하였고 사졸과 더불어 함께 고생을 달게 여겼으며

병기와 의장은 법으로 구분하였고 정확하고 적절함은 보통 사람을 뛰어넘었다.

지금의 극적궁과 연쇄갑 및 산예무와 더불어 물을 뛰어넘으며 말을 타고 활 쏘기를 연습하는 것은 모두 한세충이 남긴 법이었다.

일찍이 독화살에 명중되어 뼈에 박혔는데 강노로써 묶어서 뽑아냈고, 열 손가락 중에 겨우 4개만 온전하였고 움직일 수가 없었다.

칼에 맞은 흉터와 화살에 맞은 흔적이 마치 새긴 그림과 같았다.

또 사람의 우수함을 알고 칭찬하고 부렸는데 성민, 해원, 왕승, 왕권, 유보, 악초가 병졸에서 일어나

장모(장수의 표식인 깃대의 장식)를 쥐게 되었는데 모두 한세충과 같은 고향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병권을 해임하고 정치를 그만두고는 집에 숨어 산지가 무릇 10년이었는데

담담하고 태연자약하니 일찍이 권세 있는 자리에 있던 자가 아닌 것 같았다.

만년에 내려놓은 것과 늙는 것을 기뻐하였고 청량거사(清涼居士)라 스스로 호칭하였다.

아들은 한언직, 한언질, 한언고이고, 모두 재주가 있어 등용되었다.

한언고는 호부상서이다.



송사 한세충 열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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