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무황제 노아합기 국역 65부-친동생 슈르가치 죽다! 무황제실록 번역

안녕하세요. 길공구입니다.

청 개국 후 태종 숭덕조 1636년에 편찬된 태조무황제실록(太祖武皇帝實錄)을 틈틈이 국역코자 합니다.
무황제실록은 강희제에 의해 다듬어지고 변경된 청실록 고황제실록의 원본으로
태조 누르하치의 일대기를 있는 그대로 투박하게 기록한 사서라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사전 보고 번역하는 것이라, 오역이 많습니다.
수정할 부분 알려 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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辛亥年二月,太祖查本國寒苦曠夫千餘,皆給配,中有未得者,發庫財與之,令其自娶,於是民皆大悅。
七月,太祖命子阿布太台吉、非英凍、雄科落等,領兵一千,討兀吉部內兀兒孤沉、木冷二衛,皆取之。
八月十九日,太祖同胞弟打喇漢把土魯薨,年四十八歲。
生六子,長曰阿敏,次曰扎撒革吐,三曰土龍,四曰債桑孤,五曰吉兒剛郎,六曰非揚古。

時東海虎兒哈部內扎古塔處居民來附,太祖賜甲三十副,此民將所賜之甲,送與兀吉部內查哈量處居人,披於木上射之。

又受兀喇國布占太招撫布匹。

十二月命呵呵里厄夫、厄一都、打喇漢蝦三人,領兵二千征虎兒哈衛,圍扎塔城三日,

招之而不服,遂拔其城,殺兵一千,獲人畜二千,相近之衛皆招服,

將土勒伸、厄勒伸二酋長及人民五百戶收之而回。

신해년(辛亥年/1611년) 2월에, 태조(太祖)가 본국(本國)의 한고(寒苦/가난함)하고 
광부(曠夫/홀아비) 천여(千餘)를 조사(查)하여,
모두 급배(給配/짝을 줌)하였고, 그 중(中)에 득(得)하지 못하는 자들은,
곳재(庫財/곳간의 재물)을 베풀어 주었고, 그 스스로 장가가게 하였는데, 이에 백성이 모두 대열(大悅/크게 기뻐함)하였다.
7월에, 태조(太祖)가 아들 아포태(阿布太/아바타이) 태길(台吉/타이지), 비영동(非英凍/피옹돈), 웅과락(雄科落/숑코로) 
등(等)에게 명(命)하여,
병 1천을 거느리고, 올길부(兀吉部) 내(內)의 올아고침(兀兒孤沉/우르구천)과 목랭(木冷/무런) 2위(衛)를 토벌(討)하게 하였고,
모두 취(取)하였다.
8월 19일에, 태조(太祖)의 동포(同胞/동복) 동생 타라한(打喇漢/다르한) 파토로(把土魯/바투루)가 훙(薨)하였는데, 
나이 48세(歲)였다.
여섯 아들을 낳았는데, 장남(長)은 말하길 아민(阿敏)이고, 차남(次)은 말하길 찰살혁토(扎撒革吐/자샄투),
삼남(三)는 말하길 토룡(土龍/툴운), 사남(四)는 말하길 채상고(債桑孤/자이상워), 
오남(五)은 말하길 길아강랑(吉兒剛郎/지르갈앙), 육남(六)은 말하길 비양고(非揚古/퍙워)이다.
이때 동해(東海) 호아합부(虎兒哈部/훠르가부) 내(內) 찰고탑(扎古塔/자쿼타)이란 곳의 거민(居民/주민)이 내부(來附)하니,

태조(太祖)가 갑옷(甲) 30 부(副/벌)을 하사(賜)하였고, 이 주민들(民)이 장차(將) 하사받은 갑옷을,

올길부(兀吉部/워지부) 내(內) 사합량(查哈量/사하랸)이란 곳의 거인(居人/거주하는 사람)에게 송여(送與/보내어 줌)하였고,

목상(木上/나무 위)에 피(披/걸침)하고 사(射/쏨)하였다.

또 올라국(兀喇國/울아국) 포점태(布占太/부잔타이)가 초무(招撫/불러 어루만짐)한 포필(布匹/포목)을 수(受/받음)하였다.

12월에 하하리(呵呵里/호호리) 액부(厄夫/어푸), 액일도(厄一都/어이두), 타라한(打喇漢/다르한) 하(蝦/햐) 3인에게 명(命)하여,

병(兵) 2천을 영(領/거느림)하여 오아합위(虎兒哈衛)를 정벌(征)하게 하였는데,

찰고탑성(扎塔城)을 3일을 포위(圍)하였고, 초유(招)하여도 불복(不服)하니,

마침내 그 성(城)을 발(拔/쳐서 빼앗음)하였고, 병(兵) 1천을 살해(殺)하고,

인축(人畜/사람과 가축) 2천을 획득(獲)하였고, 상근(相近/근접)한 위(衛)를 모두 초복(招服/불러 복종시킴)하였고,

장차(將) 토륵신(土勒伸/툴어션)과 액륵신(厄勒伸/어러션) 2 추장(酋長)과 더불어 인민(人民) 500호(戶)를 

수(收/거둠)하고는 회군(回)하였다.

 



1611년 2월에 태조가 본국의 가난한 홀아비 천여 명을 조사하여 모두 짝을 주었고
그중에 신부를 얻지 못한 자들은 곳간의 재물을 베풀어 주어
그 스스로 장가 가게 하였는데 이에 백성들이 모두 크게 기뻐하였다.
7월에 태조가 아들 아바타이 타이지(아포태 태길), 피옹돈(비영동), 숑코로(웅과락) 등에게 명하여
병 1천을 거느리고 워지부(올길부) 내의 우르구천(올아고침)과 무련(목랭) 2위를 토벌하게 하여 모두 취하였다.
8월 19일에 태조의 동복동생 다르한 바투루(타라한 파토로/슈르가치)가 훙하였는데 나이 48세였다.
여섯 아들을 낳았는데 장남은 아민이고, 차남은 자샄투(찰살혁토), 3남은 툴운(토룡), 4남은 자이상워(채상고),
5남은 지르갈앙(길아강랑), 6남은 퍙워(비양고)이다.
이때 동해 훠르하부(호아합) 내 자쿼타(찰고탑)이란 곳의 주민이 내부하니 태조가 갑옷 30벌을 하사하였는데,
이 주민들이 장차 하사받은 갑옷을 워지부 내 사하랸(사합량)이란 곳에 거주하는 사람에게 보냈는데
이들이 나무 위에 갑옷을 걸치고 화살을 쐈다.
또 울아국(올라국) 부잔타이(포점태)가 회유하여 내린 포목을 받았다.
12월에 호호리 어푸(하하리 액부), 어이두(액일도), 다르한 햐(타라한 하) 3인에게 명하여
병 2천을 거느리고 오아합위를 정벌하게 하였는데 찰고탑성을 3일간 포위하였고
항복하라 하여도 거부하니 마침내 그 성을 쳐서 빼앗고는 병력 1천을 살해하고 사람과 가축 2천을 획득하였으며,
근접한 위를 모두 불러 복종시키고는 장차 툴어션(토륵신)과 어려션(액륵신) 두 명의 추장과 더불어
인민 500호를 거두고는 회군하였다.

요약.
1611년 2월 누르하치는 만주(건주)의 홀아비 1천 명을 결혼시키고 결혼하지 못한 자들에겐 재물을 내린다.
한편 동해여진 약탈전은 계속되었는데 1611년 7월 아바타이, 피옹돈, 숑코로는 워지부를 정벌한다.
또 12월에도 호호리, 어이두, 다르한 햐가 동해여진 오아합위를 정벌한다.
한편 이해 8월 19일 누르하치의 친동생이자 만주의 권력 1/3을 보유하고 있던 슈르가치가 죽었다.
무황제실록에는 슈르가치의 죽음의 이유에 대해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원초적 만주어 사서인 만문원당과 만문노당에는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슈르가치는 이미 오래전부터 형 누르하치에게 불만을 품어왔고 1609년에는 독립을 꾀하여 하였다.
이에 누르하치는 1609년 3월 13일 슈르가치의 모든 권한을 박탈하고 슈르가치를 부추겼다는 이유로
종친 아시부와 암반 울쿤 몽오를 화형에 처했다.
이에 슈르가치는 울분에 차서 2년여를 살았고 1611년 8월 19일 죽었다.
만문원당에는 형에게 계속 불만을 품다가 죽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바 자살로 추정된다.
조선의 기록 등에는 누르하치가 처형했다고 하나 이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만문원당에는 누르하치가 장남 추옝을 처형했다고도 기록한 사서이기 때문에
슈르가치의 처형을 감출 이유가 전혀 없다 하겠다.
한편 울아 부잔타이를 격파하고 동해여진의 패권을 장악한 누르하치는 동해여진에 대한 영향력을 더욱 강화한다.
누르하치는 훠르하 자쿼타 부족민에게 갑옷 30벌을 하사하였는데
이들은 이 갑옷을 워지부 사하랸에 보냈다.
워지부 부족민은 누르하치가 하사한 갑옷을 나무에 걸치고 화살을 쏘며 적대감을 표출한다.
이들은 또한 울아 부잔타이에게도 구원의 손길을 내민다.
당시 울아는 몇 차례 만주군에 격파당한 후 동해여진으로 진출할 여력을 완전히 잃어버렸다.
특히 오직 조선왕조실록에만 기록된 1609년 초 두만강 일대의 문암에서 
누르하치군과 부잔타이군이 격돌하여 울아군이 7~9천이나 몰살당한 기록도 있다.


-66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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