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청실록 20부-삼전도(1) 병자호란 이야기

안녕하세요. 길공구입니다.

그간 원초적 만주어 사서 만문노당의 맨 마지막 부분, 즉 1636년 11월~12월 병자호란 관련 부분을 번역하여 연재하였는데요.

만주어 사서 만문노당은 1636년이 마지막입니다.

하여 이후의 내용은 한문사서 청실록 태종 문황제실록을 틈틈이 번역해 볼까 합니다.


1부-청태종 남한산성을 둘러보다

2부-아녀자같이 숨느냐? 만세의 웃음거리다!

3부-소국의 왕이 대국의 황제에게 간곡히 청하나이다.

4부-한족 3왕의 화포부대 도

5부-조선의 반격 광교산 전투와 양고리 전사!

6부-청 태종 통곡하고 또 통곡하다!

7부-도르곤 김자점을 추격하다!(홍이포 도착)

8부-목을 길게 빼고 패왕 대국황제의 말씀만 기다리고 있나이다!

9부-선봉대는 돌아가 배를 만들라! 강화도를 먼저 칠 것이노라!

10부-<조선왕 너는 입만 살았다!>조목조목 반박하는 청태종

11부-<엎드려 바라옵건대 황제는 용서하소서!>김상헌이 찢은 그 국서

12부-너의 죄를 사하노라! 성을 나와라! 척화대신 3~4명은 반드시 죽이겠노라!

13부-칭신하다! 그러나 국왕 출성과 척화대신 박송은 거부하다.

14부-강화도 함락!

15부-강화도가 함락되었다! 안 나오면 네 식솔은 어찌 되겠느냐?

16부-폐하(홍타이지)는 신(인조)의 하늘이니 재조지은을 베푸소서!

17부-인조 출성을 결심하다!

18부-인조 눈물로 삼학사를 죽음의 길로 보내다!

19부-조선은 청의 영원한 속국이 될 것이니라!


병자호란 만주어 만문노당 1부~65부 http://cafe.naver.com/booheong/158623


청실록 원본 출처 : http://sillok.history.go.kr/mc/main.do


사전 보고 번역하는 것이라, 오역이 많습니다.
수정할 부분 알려 주시면, 바로 수정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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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실록 태종문황제 1637년 1월 30일

○庚午朝鮮國王李倧以漢江口濱海之地、及江華島城既失妻子及群臣盡被俘獲身復受困南漢。

旦夕城陷八道人民流離四散各道援兵皆被擊敗宗社將覆無計可免

上降敕曉諭赦過宥罪許其歸降。於是棄兵器服朝服率文武群臣獻上明國所給敕印

自南漢山城來朝見禮臣於漢江東岸三田渡地方築壇設黃幄畢

上於辰刻出營旗纛森列奏樂渡漢江。登壇端坐設鹵簿如常儀將士皆擐甲列隊李倧率文武群臣離南漢山五里許。步行來朝。

上命戶部承政英俄爾岱馬福塔等。迎於一里外指示禮儀引至儀仗下立。

○庚午朝鮮國王李倧以漢江口濱海之地、及江華島城既失妻子及群臣盡被俘獲身復受困南漢。

旦夕城陷八道人民流離四散各道援兵皆被擊敗宗社將覆無計可免

上降敕曉諭赦過宥罪許其歸降。於是棄兵器服朝服率文武群臣獻上明國所給敕印

自南漢山城來朝見禮臣於漢江東岸三田渡地方築壇設黃幄畢

上於辰刻出營旗纛森列奏樂渡漢江。登壇端坐設鹵簿如常儀將士皆擐甲列隊李倧率文武群臣離南漢山五里許。步行來朝。

上命戶部承政英俄爾岱馬福塔等。迎於一里外指示禮儀引至儀仗下立。

○경오일(庚午)에 조선국왕(朝鮮國王) 이종(李倧)이 한강(漢江) 입구(口) 빈해(濱海/바다에 접함)의 땅과 더불어 강화도성(江華島城)을 이미 잃었고,

처자(妻子)와 더불어 군신(群臣/뭇 신하)이 모두 부획(俘獲/포로)을 당하였고,

자신은 남한(南漢)은 성(城)의 함락(陷)이 단석(旦夕/아침저녁)함으로써 거듭 수곤(受困/곤경에 빠짐)하였으며,

8도(道)의 인민(人民)은 유리(流離/정처 없이 떠도는 것)하고 사산(四散/사방으로 흩어짐)하였고,

각도(各道)의 원병(援兵)은 모두 격패(擊敗/공격하여 깨트림)를 당하였고,

종사(宗社)는 장차(將) 다시 면(免)함이 무계(無計/계책이 없음)하였다.

상(上)이 효유(曉諭/알아듣도록 타이름)하는 칙서(敕)를 내리고,

사과(赦過/잘못을 용서함)하여 유죄(宥罪/죄를 너그러이 용서함)하여 그 귀항(歸降/귀순, 투항)을 허(許)하였다.

이에 병기(兵器)를 기(棄/버림)하고 조복(朝服/조정에 나아갈 때 입는 예복)을 입고, 

문무(文武)의 군신(群臣/뭇신하)을 인솔(率)하여 명국(明國)이 소급(所給/준 바)한 칙인(敕印/칙서와 관인)을 헌상(獻上/임금에게 바침)하여,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부터 내조(來朝)하여 예신(禮臣/신하의 예법)으로 알현(見)하였다.

남한(漢江) 동안(東岸/동쪽 연안) 삼전도(三田渡) 지방(地方)에 축단(築壇/단을 쌓음)하고 

황악(黃幄/황제의 휘장)의 설치(設)를 마치자,

상(上)이 진각(辰刻/07~09시)에 출영(出營/영을 나옴)하였는데 

기둑(旗纛/군용 깃발)은 삼렬(森列/촘촘히 배열함)하였고 주악(奏樂/음악을 연주함)하였으며,

한강(漢江)을 도(渡/건넘)하여 등단(登壇/단에 오름)하고 단좌(端坐/단정하게 앉음)하였으며,

노부(鹵簿/임금의 행차시 의장대)의 설치(設)는 평상(常)과 같았다.

장사(將士/장수와 병졸)의 의식(儀)은 모두 환갑(擐甲/갑옷을 두름)하고 열대(列隊/나란히 대열을 섬)하였다.

이종(李倧)이 문무(文武) 군신(群臣/뭇신하)를 인솔(率)하여 남한산(南漢山)을 리(離/떠남)하여,

5리(里)를 보행(步行/걸어옴)하여 내조(來朝)함을 허(許)하였다.

상(上)이 호부승정(戶部承政) 영아이대(英俄爾岱/잉월다이,용골대)와 마복탑(馬福塔/마푸타) 등(等)에게 명(命)하여 

1리(里) 밖에서 영(迎/맞이함)하여 예의(禮儀)로 인(引/이끎)하도록 지시(指示)하였으며 의장(儀仗) 아래에 이르러 서게 하였다.


○1637년 1월 30일에 조선국왕 이종이 한강 입구 연해의 땅과 더불어 강화도성을 이미 잃었고

처자와 더불어 뭇 신하가 모두 포로로 잡혔으며 자신은 아침저녁으로 남한성이 함락할 곤경에 빠져 있었고,

8도의 인민은 정처 없이 떠돌아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각도의 원군은 모두 패전을 당하여 장차 종사를 다시 세울 계책이 없었다.

상(청 태종 홍 타이지)이 회유하는 칙서를 내려 잘못을 너그러이 용서하여 그 귀순을 허락하였다.

이에 병기를 버리고 조복(조정에 나아갈 때 입는 예복)을 입고 문무의 신하들을 인솔하여

명나라가 내려준 고명과 인장을 헌상하여 남한산성으로부터 내조하여 신하의 예법으로 알현하였다.

남한강 동쪽 연안 삼전도 지방에 단을 쌓고 황악(황제의 휘장)의 설치를 마치자

상이 07~09시에 영을 나왔는데 기둑(군용 깃발)은 촘촘히 배열하였고 주악을 연주하였으며

한강을 건너 단에 올라 단정하게 앉았는데 의장대의 설치는 평상시와 같게 하였다.

장졸의 의식은 모두 갑옷을 입고 나란히 배열을 서게 하였다.

이종이 문무의 신하들을 인솔하여 남한성을 떠나 5리를 걸어 내조하도록 허락하였다.

상이 호부승정 영아이대(잉월다이, 용골대)와 마복탑(마푸타) 등에게 명하여 1리 밖에서 맞이하여

예의로 인도하도록 지시하였고 의장 아래에 이르러 서게 하였다.



요약.

1637년 1월 30일 마침내 한강 동쪽 현 송파구 삼전동에 위치한 나루터인 삼전도 인근에 단이 설치된다.

청 태종 홍 타이지는 아침 07~09시에 진영을 나와 한강을 건너 삼전도로 갔다.

이때 각종 깃발이 촘촘하게 배치되었고 주악이 흘렀으며 의장대가 배치되었다.

홍 타이지가 마전포(麻田浦)에 이르러 황색 장막을 펼친 곳 정중앙에 앉자

휘하 장졸들은 모두 갑옷과 궁검을 차고 사각 방진을 이루어 홍 타이지를 둘러싸고 있었다.

한편 남한산성의 인조는 용골대가 오기 전에 성을 나가기로 결정하고 해가 밝자마자 07~09시

황포를 벗고 남염의(藍染衣)를 걸치고 투항의 예를 따라 남문이 아닌 서문으로 50여 명의 신하들을 거느리고 나온다.

이에 서문에 배열에 있던 조선 신하들은 모두 가슴을 치며 통곡한다.

청은 투항의 예인 몸을 결박하거나 관을 끌고 오는 절차는 모두 생략한다.

4리를 가 인조가 백마에서 내려 풀을 깔고 앉아 있으니 곧 청의 무장 기병 수백이 말을 달려 인조의 좌우에 배치되었다.

한참 뒤에 용골대(잉월다이)와 마복대(마푸타)가 영접을 나왔고 

인조와 용골대 등은 서로 두 번 읍한 이후 수명의 신하만 대동하여 용골대를 따라 삼전도로 향한다.

1리를 말을 타고 삼전도에 도착한 인조는 말에서 내려 의장 아래에 서있었다.

 

-21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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