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청군5만 4부-노예병(쿠투러) 병력 연구 병자호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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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편에서 병자호란에 참가한 팔기 여진족+팔기 내번 몽고족의 총합은약 10656명

(기병 4995명 / 보병 3330명 / 바야라병 2331명)

https://cafe.naver.com/booheong/167997


2편에서 팔기 한족(우전 초오하)+3왕(공유덕,경중명,상가희)의 총합은 11340명

(기병 약 1천, 보병 1만340명)

https://cafe.naver.com/booheong/168003


3편 병자호란 외번 몽고족(12부족) = 11995명

https://cafe.naver.com/booheong/168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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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병자호란에 참전한 팔기군 노예병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기본적으로 팔기군의 노예병의 주인은 팔기군 병사입니다.

후금초 포로로 잡혔던 이민환은 당시 팔기군 병사들은 농업에 종사치 않으며

거의 모든 팔기군 병사들이 노비를 보유하고 있다고 기록하였습니다.


1619년 당시 만주의 병사와 노비 https://cafe.naver.com/booheong/115723


누르하치는 선대 금나라 아골타와 달리 여진족 노비 해방을 선언한 적이 없었으므로

팔기군 병사의 노비는 여진 통일전 당시에 잡아온 여진족, 한족, 조선인, 몽고족 등 매우 다양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팔기군 노예병들은 딱히 동원명령이 하달되진 않았고

전장에서 주인인 팔기군 병사와 함께 약탈하기 위해 출전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물론 노비병들이 대규모로 동원된 전례도 있긴 합니다.

1618년 사르후 전투 직전에 누르하치는 4만 명의 노예를 명과의 국경 사르후에

성을 쌓으라고 400명의 팔기 병사와 함께 보낸 적이 있었지요.


기본적으로 팔기군의 병사는 평민이고 만주어로는 irgen[이르건], baisin[바이신]이라 불립니다.

반면 노예는 남자는 aha[아하], 여자는 nehu[너후]라고 부릅니다.


문제는 전시에 종군한 kutule[쿠투러]의 존재입니다.

쿠투러는 만주어 쿠투럼비(kutulembi)에서 파생되었으며

뜻은 [말을 끌다, 짐승의 입을 잡아당기다]입니다.

쿠투러는 [마부]를 뜻하지요.


저는 초기에 쿠투러를 종군한 평민 여진족이라 생각했습니다.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1619년 7월 26일 철령성 함락 후 어린이와 늙은이로 구성된 쿠투러들이 

   성밖으로 말에게 풀을 먹이기 위해 나섰다가

   몽고 자이사이의 습격을 받아 죽습니다.

2. 1621년 3월 요양성&심양성을 함락한 누르하치는 전군에 포상을 내리는데

   쿠투러들은 경보병과 똑같이 포 3필을 하사받습니다.


저는 니루에서 어른들을 따라 종군한 평민 어린이나, 노쇠한 늙은이들이 전투에는 참가하지 않고

말을 관리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누르하치가 노예까지 포상하리라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르하치를 거쳐 홍 타이지대의 만문노당을 계속하여 살펴보니

쿠투러는 노예병이 맞다는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또한 조선이 편찬한 한청문감에 만주 노비에 대해 상세히 기록하였는데 여기에 쿠투러를 노비라 기록하였더군요.

반박 불가의 사실이라 생각됩니다.



1. 아하[aha] : 사나이 종, 노복, 보오이 타쿠라라 냘마(집의 부리는 사람)

2. 너후[nehu] : 계집 종. 시비, 허허 아하(여자 노비)

3. 다할지[dahalji] : 한족 관리의 노비

4. 쿠투러[kutule]

 : 근마인(跟馬人/말을 따르는 사람)

 : 구사이 울서 버 다하머 야부러 아하시(gvsai urse be dahame yabure ahasi)

   기의 사람 을 따르며 가는 노비들.

5. 쿠터치[kuteci] : 말 끄는 사람, 노비 아님

6. 가린[garin] : 허드래 구종, 허드렛일하는 노비.

7. 푸타히[futahi] : 1대 노비. 어무 잘안 오호 아하[emu jalan oho aha], 1세대 된 노비.

8. 푸르나[furna] : 2대 노비. 줘 잘안 오호 아하[juwe jalan oho aha]

9. 볼호수[bolhosu] : 3대 노비

10. 겅예수[genggiyesu] : 4대 노비

11. 당칸[dangkan] : 대를 이어 노비가 된 노비.


아예 노비 신분인 쿠투러와 평민인 쿠터치를 구분하고 있습니다.

일반 마부는 쿠터치라고 부르네요.


결론인즉 쿠투러는 주인인 팔기 병사를 따라 종군한 노비를 뜻하는 말입니다.

이들은 주로 주인의 말을 관리하며 때로는 전투에도 참가하고 약탈전에도 참가합니다.


살펴보니 홍 타이지는 팔기 병사들이 쿠투러에게 약탈짓을 시키고 있다며 질책하는 말도 하였더군요.


만문노당 1631년 10월 2일 기사中

juwan biyai ice juwe de. coohai niyalma de wasimbuha bithei gisun.

10 월 초 2 에. 군대의 사람 에 내려준 글의 말.

han hendume. jamarara jalin de daci toktobuha xajin kai.

한 말하길. 시끄럽기 때문 에 원래부터 정해준 법 이니라.

te jamarangge yendehebi.

지금 시끄러운것 일어나고있다.

ainu cihai sindafi jamarabumbi.

어찌하여 멋대로 풀어서 시끄럽게하느냐?

jai yaya bade orin uksin geneci. orin uksin i kutule.

또 어느 곳에 20 갑병 가면. 20 갑병 의 쿠투러.

tofohon uksin geneci. tofohon uksin kutule genembihe kai.

15 갑병 가면. 15 갑병 쿠투러 가있었다 하느리라.

te tuwaci. beye tatan de tefi.

지금 보아하니. 스스로 숙영지 에 머물고.

kutule be dahame unggifi balai facuhvn yabumbi.

쿠투러 를 따르며 보내서 함부로 혼란하게 행하느냐?


(1631년) 10월 2일에 병사들에게 내려준 글의 말

   <한(홍 타이지) 말하길 시끄럽기 때문에 원래부터 정해준 법이니라.

    지금 시끄러운 것 일어나고 있다.

    어찌하여 (쿠투러를) 멋대로 풀어서 시끄럽게 하느냐?

    또 어느 곳에 20갑병 가면 20갑병의 쿠투러,

    15 갑병 가면 15갑병 쿠투러 가 있었다 하느리라.

    지금 보아하니 (병사들 너희들은) 스스로 숙영지에 머물고.

    쿠투러를 따라 보내서 함부로 혼란하게 행하느냐?>


위의 내용인 즉슨 1631년 8~10월간 벌어진 장기간의 대릉하성 포위전에

홍 타이지는 팔기군 병사들의 의복을 본국에서 가져오기 위해 쿠투러들을 보내기도 하였고

때로는 쿠투러들을 미끼로 삼아 인근의 명군의 요격을 유도하기도 하였는데요.

일부 쿠투러 들이 인근을 약탈하였나 봅니다.

이는 팔기군 병사들이 자신들은 군영에 머물면서

비교적 자유로운 자신들의 노비인 쿠투러들을 현지에 풀어 약탈을 하게 한 것을

홍 타이지가 알고 질책하는 내용입니다.


일전에 청나라 노예병, 쿠투러를 알아보면서

1631년 조대수가 축성하던 대릉하성 포위전 당시 홍 타이지의 언급을 인용하여

팔기 1명의 병사에 1명의 쿠투러가 따라갔으니 병자호란도 1:1로 참전한 것 아니냐? 라고 하였는데요.

구범진, 이재경의 논문 <병자호란 당시 청군의 편성과 규모>에서는

팔기 병사는 0.5, 외번 몽고도 0.5로 추정하였습니다.

근거는 1634년 2월 금주 약탈전 팔기 갑사2인당 1쿠투러

1636년 3월 모오밍안 도망자 추격전에 외번 몽고 갑사1인당 0.52쿠투러를 들었습니다.


1631년 대릉하성 포위전 당시 홍 타이지는 갑병들이 자기들은 숙영지에 있고

쿠투러들을 보내 문란하게 약탈을 하였다며 강하게 질책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여 이후로는 쿠투러에 대한 제한을 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기본적으로 쿠투러는 팔기 병사들의 개인 노예기 때문에 이전의 동원은 중구난방이 아니었나 싶네요.


청실록을 대략 훑어보니 역시 1634년 이후로는 쿠투러의 비율이 대략 0.5가 확인되었습니다.


청실록 태종 1634년 2월 18일 기사中

○乙亥。以前遺錦州書、恐不能達。照前書重繕遣勞薩、色楚蘇爾德鄂碩、席特庫、沙爾虎達、努山等。

率護軍精騎八十名。廝卒四十名。往錦州捉生。并齎書往。諭之曰。

○을해일(乙亥)에, 이전(以前)에 금주(錦州)로 서신(書)을 유(遺)하였는데,

도달(達)이 불능(不能)할까 공(恐)한다.

전서(前書)에 중선(重繕)을 조(照)하여, 노살(勞薩)과 색초소이덕악석(色楚蘇爾德鄂碩),

석특고(席特庫), 사이호달(沙爾虎達), 노산(努山) 등(等)을 보내,

호군(護軍/바야라) 정기(精騎) 80명(名)과 시졸(廝卒/쿠투러) 40명(名)을 인솔(率)하고

금주(錦州)로 왕(往)하여 착생(捉生)하게 하였고, 아울러 재서(齎書)하여 가 유지(諭)하여 말하길


☞ 바야라 80명에 쿠투러 40명으로 50% 비율입니다.



청실록 태종 1637년 12월 24일 기사中

遣丹岱薩蘇喀譚拜拜賽率護軍四十人。廝卒二十人騎兵四十人前往捉生於二十六日。入白土塲二十七日。

遇明兵七百於清河突入。擊敗之獲馬二十有二纛二

단대(丹岱), 살소객(薩蘇喀), 담배(譚拜), 배새(拜賽)를 보내 

호군(護軍) 40인과 시졸(廝卒) 20인과 기병(騎兵) 40인을 인솔(率)하여

26일에 앞서 가게 하여 착생(捉生/포로 심문)하게 하고,

백토장(白土塲)으로 27일에 들어가, 청하(清河)에서 명병(明兵) 7백과 조우하였는데

돌입(突入)하고 격패(擊敗)하였고, 말 22마리와 독(纛/군기) 2개를 획득(獲)하였다.


☞ 바야라 40명, 기병 40에 쿠투러 20명으로 25% 비율입니다.


청실록 태종 1640년 7월 27일 기사中

且此軍一千名外。廝卒五百名。所食糗糧、及船中餘米。運於海州衛。

또 이 군(軍) 1천명(名) 외(外)에 시졸(廝卒) 500명(名)이 먹을 구량(糗糧)과 더불어

선중(船中)의 여미(餘米)는 해주위(海州衛)에 운반(運)하게 하였다.


☞ 결정적인 수치네요. 갑병1천에, 쿠투러 500명입니다. 50%입니다.



청실록 태종 1641년 3월 24일 기사中

○命朝鮮國總兵柳琳、副將刁何良、丁天機、米塔尼、任大尼、率兵千人。廝卒五百人。馬一千一百五十五匹。

往錦州。助和碩鄭親王濟爾哈朗軍

○명(命)하여 조선국(朝鮮國) 총병(總兵) 유림(柳琳)과 부장(副將) 조하량(刁何良), 정천기(丁天機),

미탑니(米塔尼), 임대니(任大尼)는 병(兵) 천인(千人)과 시졸(廝卒) 500인 및 말 1155필(匹)을 인솔(率)하여,

금주(錦州)로 가서 화석정친왕(和碩鄭親王) 제이합랑(濟爾哈朗) 군(軍)을 조(助)하게 하였다.


☞ 1641년 조대수가 지키는 명나라 금주성 포위전 당시 조선군도 출정하였는데, 

조선은 유림(柳琳)을 대장으로 중군은 영변 부사(寧邊府使) 조후량(趙後亮), 중영장은 용천 부사(龍川府使) 이탄(李坦), 

좌영장은 서흥 부사(瑞興府使) 정척(鄭倜), 우영장은 영유 현령(永柔縣令) 신단(申檀) 등을 데리고 갔습니다.

청실록의 조하량은 조후량, 정천기는 정척으로 생각되며 미탑니, 임대니는 만주인으로 생각됩니다.

일단 조청 연합군으로 생각은 드는데 병은 1천, 쿠투러는 500, 말은 1155필이네요.

비율은 역시 50%입니다.



청실록 태종 1642년 12월 10일 기사中

○朝鮮國副將一員。參將二員。守備四員。率兵四百名。廝卒二百名。赴錦州更番駐防。

令禮部參政張良弼、於東京迎宴之

○조선국(朝鮮國) 부장(副將) 1원(員), 참장(參將) 2원(員), 수비(守備) 4원(員)이

병(兵) 400명(名)과 시졸(廝卒) 200명을 인솔(率)하여 금주(錦州)에 이르러 주방(駐防)을 경번(更番)하니,

예부(禮部) 참정(參政) 장량필(張良弼)로 하여금 동경(東京)에서 영연(迎宴)하게 하였다.


☞ 조선인 쿠투러(노예병)???????? 일단 비율은 병400, 쿠투러200으로 50%입니다만....
조선 병사들도 노예를 부렸나요???


청실록 1643년 7월 7일 기사中
又賞八旗護軍校五十六員、軍士三百三十二名、廝卒四百二十六名、每護軍校各銀四十。每軍士各銀三十。
每廝卒各銀十五。計共銀一萬八千五百九十兩。
(중략)
又賞左翼軍士四百八十名、廝卒四百七十三名、右翼軍士四百七十九名、廝卒四百六十五名、計共銀一萬四千二百三十兩
또 팔기(八旗) 호군(護軍) 장교(校) 56원(員), 군사(軍士) 332명(名), 시졸(廝卒) 426명(名),
매(每) 호군(護軍) 장교(校)마다 각각(各) 은(銀) 40,
매(每) 군사(軍士)마다 각각(各) 은(銀) 30,
매(每) 시졸(廝卒)마다 각각(各) 은 15,
계공(計共)하여 은(銀) 1만8590냥(兩)을 포상(賞)했다.
(중략)
또 좌익(左翼) 군사(軍士) 480명(名), 시졸(廝卒) 473명(名), 
우익(右翼) 군사(軍士) 479명(名), 시졸(廝卒) 465명(名),
계공(計共)하여 은(銀) 1만4230냥(兩)을 포상(賞)했다.

☞ 1634년 흑룡강(黑龍江) 부락(部落) 정벌전을 다녀온 병사들에 대한 포상 내역입니다.
이것을 보면 바야라군은 장교 56명, 갑병 332명, 쿠투러 426명
좌익군은 갑병 480명, 쿠투러 473명,
우익군은 갑병 479명, 쿠투러 465명이네요.
바야라군은 장교+갑병vs쿠투러 비율이 110%까지 올라가네요.
좌익군은 99%이며, 우익군은 97% 비율입니다.

☞ 점점 노예병의 비율이 높아진 걸까요?

태종조 쿠투러 기사는 위 기사가 거의 마지막이네요.
쿠투러가 사냥시에 멋대로 궁시를 휴대했다가 죄를 받은 대목도 있고 있긴 한데
병력 구성과는 전혀 관계없으니 번역하지 않았습니다.

대략 추정해보자면
1631년전까지는 쿠투러는 팔기 병사들이 거의 1:1 비율로 데리고 전쟁에 참여하였다가
홍 타이지의 질책을 받은 이후에 점차 1:0.5 비율로 제한되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1643년 흑룡강 정벌전은 병사 1347명, 쿠투러1346명 동원되었는데 연유는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결론
팔기군 노예병인 쿠투러 동원은 병사1인당 0.5~1명 수준이다.
병자호란 즈음에는 0.5명으로 보는게 타당하다 싶다.

즉 병자호란 당시 만주+내번몽고 팔기군의 쿠투러는 약 50%로 추정되며
갑병 10656 * 50% = 5313 명으로 추정된다.
외번 몽고족의 쿠투러도 11995 * 50% = 5998 명으로 추정된다.

-5편 포의(보오이/버이러들의 가노병들)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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