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릉하성 공방전으로 살펴본 후금 갑병 동원 병자호란 이야기

1631년 8월 대릉하성 전투에 후금 홍 타이지는 1니루당 갑병 60의 동원령을 내렸고

40명은 출정, 20명은 본국 수비에 동원하였습니다.


당시 후금의 니루가 총 280여 개였으니

동원 총 병력은 16800명, 이중 대릉하로 진군한 병력은 11200명, 본국 수비는 5600명이 담당한 셈입니다.


한편 당시 외번 몽고 8개 부족에서 동원되어 후금군에 종군한 몽고군은 보기병 2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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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문노당 1631년 7월 27일 기사中

nadan biyai orin nadan de. nikan be dailame muduri erin de cooha juraka.

나단 뱌이 오린 나단 더. 니칸 버 다이라머 무두리 어린 더 초오하 주라카.

7 월의 20 7 에. 한족 을 정벌하며 용 때 에 군대 출발했다.

hecen tuwakiyame dudu taiji. sahaliyen taiji. hooge taiji be tebuhe.

허천 투와캬머 두두 타이지. 사하롄 타이지. 호오거 타이지 버 터부허.

성 지키며 두두 타이지. 사하롄 타이지. 호오거 타이지 를 남겼다.


(1631년) 7월 27일에 한족(명나라)를 정벌하러 용때(07~09시)에 군대 출발했다.

성 지키며 두두 타이지, 사하롄 타이지, 호오거 타이지를 남겼다.



만문노당 1631년 8월 1일 기사中

jakvn biyai ice de. fe liyoo yang ni bira de isinjifi.

자쿤 뱌이 이처 더. 퍼 료오 양 니 비라 더 이신지피.

8 월의 초 에. 옛 요 양 의 강 에 이르러서.

emu indeme. golo goloi monggo i cooha be boljofi acaha.

어무 인더머. 고로 고로이 몽오 이 초오하 버 볼조피 아차하.

1 잠자고. 지방 지방의 몽고 의 군대 를 기한정하고 만났다.

korcin. aru. jarut. barin. aohan. naiman. karacin. tumet.

코르친. 아루. 자루트. 바린. 아오한. 나이만. 카라친. 투머트.

코르친. 아루. 자루트. 바린. 아오한. 나이만. 카라친. 투머트.

ere jakvn goloi monggo i yafahan moringga cooha juwe tumen funceme bi.

어러 자쿤 고로이 몽오 이 야파한 모링아 초오하 줘 투먼 푼처머 비.

이 8 지방의 몽고 의 보병 기 병 2 만 남짓 이었다.


(1631년) 8월 초에 옛 요양강에 이르러서 하룻 밤 자고 

곳곳의 몽고 군대를 기한 정하고 만났다.

코르친, 아루, 자뤁, 바린, 아오한, 나이만, 카라친, 투멑

이 8 지방의 몽고의 보기병은 2만 남짓이었다.


당시 몽고군의 병력 동원령은 아래 링크를 참고하세요.


3병자호란 청군5만? 외번 몽고족 병력 연구 https://cafe.naver.com/booheong/168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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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당시 팔기군 1니루당 40갑병 동원한 대릉하 공방전 팔기 11200명에 몽고 2만을 합하면

총합 31200명이 되겠습니다.

당시 대릉하 공방전에 투입된 후금의 총병력은 다음으로 유추할 수 있습니다.



만문노당 1631년 8월 2일 기사中

tereci cooha faksalafi juwe jugvn i dosire de.

터러치 초오하 팤사라피 줘 주군 이 도시러 더.

그로부터 군대 나누고 2 길 로 들어갈 때에.

juwe tumen cooha be degelei taiji. yoto taiji. ajige taiji.

줘 투먼 초오하 버 더거러이 타이지. 요토 타이지. 아지거 타이지.

2 만 군대 를 더거러이 타이지. 요토 타이지. 아지거 타이지.

suwe gaifi. i jeo i golo be dosifi. ginjeo i dalingho i siden be kame ili.

숴 가이피. 이 저오 이 고로 버 도시피. 긴저오 이 다링호 이 시던 버 카머 이리!

너희 가지고. 의 주 의 지방 을 들어가고. 금주 의 대릉하 의 사이 를 포위하며 서있어라!

be. be tu cang ni golo be dosifi. guwangning ni amba jugvn be genembi.

버. 버 부 창 니 고로 버 도시피. 구왕닝 니 암바 주군 버 거넘비!

내. 백 토 창 의 지방 을 들어가고. 광녕 의 큰 길 을 가겠다!

ice ninggun de dalingho de acaki.

이처 닝운 더 다링호 더 아차키!

초 6 에 대릉하 에서 만나자!


그로부터 군대 나누고 2길로 들어갈 때에

2만 군대를 더걸어이 타이지, 요토 타이지, 아지거 타이지

너희가 가지고 의주 지방을 들어가고 금주의 대릉하의 사이를 포위하며 서있어라!

내 백토창의 지방을 들어가고 광녕의 큰 길을 가겠다!

(8월) 초 6일에 대릉하에서 만나자!


군을 두개로 나누었는데 더걸어이+요토+아지거에게 2만을 주어 의주를 통해 대릉하로 보냅니다.

홍 타이지는 나머지 군을 이끌고 백토창을 통해 대릉하로 갑니다.

하면 홍 타이지가 이끄는 부대도 약2만이라고 생각할 수 있겠습니다.


한명기 교수도 대릉하 공방전에 후금이 4만을 동원했다고 하더군요.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080130026004


게다가 만문노당에는 당시 동원된 여진족의 수를 매우 정확하게 다시 한번 강조하여 기록한 내용이 있습니다.

한 번 보시죠!!!


만문노당 1631년 9월 27일 기사中

tere afaha de tob seme henduci.

터러 아파하 더 톱 서머 헌두치.

그 싸움 에 정확히 한다 말하면.

nikan i cooha duin tumen. juxen i cooha emu tumen sunja minggan bihe.

니칸 이 초오하 두인 투먼. 주션 이 초오하 어무 투먼 순자 밍안 비허.

한족 의 군대 4 만. 여진 의 군대 1 만 5 천 있었다.

ere gisun dabaha ekiyehe ambula akv.

어러 기순 다바하 어켸허 암부라 아쿠.

이 말 지나침 부족함 크지 않다.

nikan be dailame deribuhei yaya mudan ci tere mudan de ambula waha.

니칸 버 다이라머 더리부허이 야야 무단 치 터러 무단 더 암부라 와하.

한족 을 정벌하며 시작함으로 어떤 때 로부터 그 때 에 많이 죽였다.


그 싸움에 정확히 한다 말하면

한족(명)의 군대 4만, 여진의 군대 1만 5천 있었다.

이 말 지나치거나 부족함 크지 않다.

한족(명)을 정벌하며 시작함으로 어떤 때로부터 그때에 많이 죽였다.


1631년 9월 27일 후금이 대릉하성을 완전히 포위한 지 2달째

마침내 영원성에서 출발한 명 원군 4만은 소릉하를 거쳐 대릉하성에 육박합니다.

이때 홍 타이지는 2만 명은 대릉하성을 방비하게 하고 2만 명을 이끌고 요격에 나섭니다.

그리고는 4만 명의 명나라 군을 완전히 몰살시켜 버리지요.

이 전과가 마음에 들었는지 만문노당에는 전에 없는 전과라며

여진의 군대가 정확하게 1만5천 있었고 명나라의 군대가 4만 있었다고

지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고 정확하게 기록한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여진병력이 1만5천이고, 나머지 몽고군+한족군이 5천인 셈입니다.

헌데 동원된 여진 갑병이 11200, 그렇다면 나머지 여진족 3800명은 누구일까요?

아마 여진 노예병(쿠툴어)들이 아닐까 싶네요.


당시 동원된 한족군은 퉁양성(佟養性), 만주 이름은 시 울이(si uli)가 이끌고 있었는데

이 전투에 후금 최초로 홍이포를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종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631년 8월 대릉하성 공방전에 동원된 후금 팔기갑병 11200,

외번 몽고 2만, 한족군 8800 총 4만

여기에 종군한 노예병인 쿠툴어까지 합산하면 총 5만으로 추산됩니다.

당시 홍 타이지의 쿠툴어 발언은 아래 링크를 참고하세요.


4병자호란 청군5만? 노예병(쿠툴어) 병력 연구 https://cafe.naver.com/booheong/168090



결론 : 

후금 갑병 동원으로 인한 실질 병력 추산은 비교적 정확하다 할 수 있다.

따라서 병자호란 당시 1니루당 32 갑병 동원으로 인한 

참전 청군은 약5 만이 실제에 가까우며, 정확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본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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