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홍이포 수량 파악 1부 병자호란 이야기

홍이포(홍의포) 명나라가 네덜란드 대포를 본따 만든 화포로

이미 영원성 전투에서 후금은 그 위력에 쓴맛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후 후금은 홍이포를 보유하고자 하였고 병자호란 당시에는 46문을 보유한 것으로 추정하더군요.

병자호란 당시 청은 6차 부대인 두두, 한족3왕, 한족군(우전 초오하)에게 이 홍이포 수송을 맡겼고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 홍이포를 빨리 수송하라 독촉하기도 하였습니다.

홍이포가 도착하자 홍 타이지는 인조에게 이런 말도 하였지요.


<중요한 홍이포도 들고 왔다! 내가 그냥 돌아갈 것 같으냐?

 군사를 풀어 8도를 유린하겠다! 조선 왕 너는 바다로 들어가라!>


홍이포를 수송할 청의 6차 부대의 편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두두 : 1니루당 갑사3명, 여진족+내번몽고족 약 960명~990명

석정주 한족 부대(우전 초오하) : 약 1만

한족 3왕 : 1340명

→ 총합 12300~12330명


당시 수송된 홍이포의 수량은 다음과 같다고 추정합니다.


수송 홍이포 총합 34문

1. 우전 초오하 보유 30문 중 18문 동원

2. 한족 3왕 보유 16문 총동원


어떤 논문에 병자호란 당시 청이 동원한 홍의포(홍이포)의 수량은 34문이며
이중 한족 3왕이 이끄는 한족 군대(천우병, 천조병)가 보유한 홍이포가 16문이고,
우전 초오하(중요한 군대/8기 한족 군대)가 보유한 홍이포가 30문중 18문이 동원되었다고 하더군요.
이 18문은 수레에 올려놓고 이동 가능한 홍이포이며 나머지 12문은 수비를 위해 성에 배치되었다고 합니다.

하여 병자호란 당시 홍이포 수량을 파악하기 위해 청실록의 1637년 까지의 모든 홍이포 기사를 
발췌하여 1차 초벌 번역를 해보았습니다.
여러 가지 재밌는 내용들이 나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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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명이 홍이포를 이용하여 선제공격하다!

청실록 태종 1630년 5월 13일 기사中

明兵復發紅衣礮、擊壞灤州城垛。城樓焚。

명병(明兵)이 다시 홍의포(紅衣礮)를 발사(發)하여 

난주성(灤州城)의 타(垛/벽)을 격괴(擊壞/공격하여 무너짐)하였고, 성누(城樓)는 분(焚)하였다.


태종 1630년 5월 23일 기사中

令每牛彔撥護軍三名。甲兵二十名。駐守其地。兵數較前更多。特命貝勒阿敏、碩託、眾大臣。

為之統率。及明兵來攻灤州。凡三日。用紅衣礮、破垛口二座。城樓被焚。我兵少卻。

매(每) 우록(牛彔)으로 하여금 호군(護軍/바야라) 3명(名)과 갑병(甲兵) 20명(名)을 발(撥)하여,

그 땅을 주수(駐守)하였는데, 병수(兵數)가 전(前)과 비교(較)하여 갱다(更多)하였다.

특명(特命)하여 패륵(貝勒) 아민(阿敏), 석탁(碩託)과 대신(大臣)무리가 통솔(統率)케 하게 하였다.

명병(明兵)과 난주(灤州)를 내공(來攻)함에 이르러,

무릇 3일간 홍의포(紅衣礮)를 사용(用)하여 타구(垛口) 2좌(座)를 파(破)하였고,

성누(城樓)는 피분(被焚)하였고, 아병(我兵)이 소각(少卻)하였다.


→ 1630년 5월 13일 명이 홍이포를 이용하여 난주를 선제공격하였다.

→ 당시 후금의 난주에는 아민, 쇼토를 대장으로 1니루당 23명, 대략 6440명(노예병 제외)이 수비하고 있었다.



2. 마침내 후금이 홍이포를 보유하게 되다!


청실록 태조 1631년 7월 18일 기사中

○庚寅。上御殿。集諸貝勒大臣。議設統兵將帥。每固山額真下、兩翼各設梅勒額真一員每甲喇、

各設甲喇額真一員。

其隨營紅衣礮、大將軍礮四十位及應用挽車牛騾。皆令總兵官佟養性管理

○경인일(庚寅)에, 상(上)이 어전(御殿)에서 여러 패륵(貝勒)과 대신(大臣)을 집(集)하여,

통병(統兵) 장수(將帥)의 설치(設)를 의논(議)하였는데,

매(每) 고산액진(固山額真/궈사 어전) 이하(下) 양익(兩翼)은 

각각(各) 매륵액진(梅勒額真/머이런 어전) 1원(員)을 설치(設)하고,

매(每) 갑라(甲喇/잘안)는 각각(各) 갑라액진(甲喇額真/잘안 어전) 1원(員)을 설치(設)하였고,

그 수영(隨營) 홍의포(紅衣礮)와 대장군포(大將軍礮) 40위(位)와 더불어

응당(應) 우라(牛騾/소와 노새)를 이용(用)하여 차(車/수레)를 만(挽/끎)하였는데,

모두 총병관(總兵官) 퉁양성(佟養性)이 관리(管理/감독관)하였다.


1631년 8월 7일 기사中

總兵官額駙佟養性、率舊漢兵載紅衣礮、將軍礮

총병관(總兵官) 액부(額駙/어푸) 퉁양성(佟養性)은 구(舊) 한병(漢兵)을 인솔(率)하여,

홍의포(紅衣礮)와 장군포(將軍礮)를 싣고


1631년 8월 12일 기사中

○是日。我軍攻城。以紅衣礮擊西南隅一臺。穿其雉堞擊死一人。臺兵驚懼遂降。隨令我軍列車盾於臺下。

以紅衣礮、大將軍礮攻城之南面壞其雉堞四。敵樓二

○이날에 아군(我軍)이 공성(攻城)하여, 홍의포(紅衣礮)로써 서남(西南) 모퉁이 1대(臺)를 공격(擊)하여,

그 치첩(雉堞/성가퀴)를 천(穿/뚫음)하여 1인이 격사(擊死)하였고,

대병(臺兵)이 경구(驚懼/놀라고 두려워함)하여 마침내 항복(降)하였다.

곧바로 아군(我軍)으로 하여금 대하(臺下)에 거순(盾/수레와 방패)을 열(列/벌려놓음)하게 하여

홍의포(紅衣礮)와 대장군포(大將軍礮)로써 남면(南面)을 공성(攻城)하였고,

그 치첩(雉堞/성가퀴) 넷과 적루(敵樓) 둘을 파괴(壞)하였다.


1631년 8월 15일 기사中

大貝勒代善、貝勒濟爾哈朗、額爾克楚虎爾貝勒多鐸、率兵三千。以紅衣礮大將軍礮、圍攻其臺。

대패륵(大貝勒/암바 버이러) 대선(代善)과 패륵(貝勒) 제이합랑(濟爾哈朗), 

액이극초호이(額爾克楚虎爾), 패륵(貝勒) 다탁(多鐸)이 병(兵) 3천을 인솔(率)하여,

홍이포(紅衣礮)와 대장군포(大將軍礮)로써 그 대(臺)를 위공(圍攻)하였다.


1631년 10월 9일 기사中

○己酉。遣官八員。率兵五百人、及舊漢兵全軍。載紅衣礮六位。將軍礮五十四位。往攻于子章臺。

○기유일(己酉)에 관리(官) 8원(員)을 보내 병(兵) 500인(人)과 더불어 구한병(舊漢兵) 전군(全軍)을 인솔(率)하여,

홍의포(紅衣礮) 6위(位)와 장군포(將軍礮) 54위(位)를 싣고 자장대(子章臺)에 왕공(往攻)하였다.


→ 1631년 7월 홍 타이지는 조대수의 대릉하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퉁양성(시 울이)를 한족 대장으로 삼아 홍이포+장군포 40문을 소와 노새를 이용해 수송하게 하였습니다.

   대릉하성에 당도한 홍이포는 곧장 대릉하성 공격에 투입되었습니다.

→ 이후 명나라 자장대를 공격하기 위해 다시 한번 홍이포 6문과 장군포 54문이 동원되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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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결론 : 후금은 1631년 마침내 명에서 노획한 홍이포를 전장에서 쓰기 시작한다.

            관할 부대는 한족으로 이뤄진 퉁양성의 부대이다.

            1631년까지 후금의 홍이포 보유량은 6문으로 보인다.


-2부에서 계속-


덧글

  • 남중생 2018/10/29 23:51 #

    "포"에 해당하는 한자가 흥미롭네요. 이체자인가 보군요?
  • 길공구 2018/10/30 10:35 #

    그런것으로 보입니다.
    송사, 원사나 명사, 명실록, 청실록 등에서 砲와 함께 같이 쓰인 기록이 있네요.

    송사
    幸飛山營幸飛山營閱礮車
    閱礮車。

    원사 中
    武衞軍礮手
    忒木帶兒礮手人
    回回亦思馬因創作巨石砲來獻

    명사 中
    俞通海以火礮焚其舟
    山東鎮南城樓大礮鳴如鐘

    명실록 中
    上知之乃命治石礟載

    청실록 中
    城上發巨礮、我參將吉拔克達中礮死
    沿陴盡列鎗礮火器、兵環四面、
    城中矢礮齊下

    유독 청실록에 礮 비중이 많네요. 대략 4743건 사용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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